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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날도 약국 앞줄이 길었다
긴 시간을 견뎌내는 시민의식

점원이 사고 못 사고 나누자
긴 줄 동요 일어난 건 한순간

안과 밖 극명하게 나눈 분위기
사람 품위 마스크 하나로 실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사태가 사그라들까 싶어 미루고 미루던 개강이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시점이다. 거의 개인지도랄 수밖에 없는 창작 수업마저 인터넷 강의가 불가피해졌으니, 본의가 아닐지라도 수업에 나름의 기대를 했을 학생들에게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당분간’ 이후에는 혹시 대면 수업이 가능할까 싶어 마스크를 구하러 나갔다.

인터넷 강의에 익숙지 않은 문제도 걱정이지만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해 가며 소통할 수 없다는 게 더 걱정이었다. 학생들과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했으니 벽에 대고 떠드는 셈이 아니겠나. 혹시라도 ‘당분간’이 길어질 경우 창작의 고민을 공유하고 제안하는 관계가 사라지니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학생들과 마주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업이란 선생과 학생이 만남을 통해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일방적인 이런 수업은 학생뿐 아니라 선생에게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도 약국 앞줄은 길었다. 배급제로 바뀌고 나서, 어리숙하게도 신분증만 있으면 그냥 마스크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난번에 약국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갔다가 허탕을 치고는 하루에 배급되는 마스크 수를 약사에게 물어봤었다. 한 번 기회를 잃으면 일주일 내내 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입 하나 가리자는 이 소모품이 너무나 간절해지는 것이다. 약사가 일러준 하루 수에 속하고자 한 시간 전에 갔건만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수십 명이다. 앞에서부터 헤아리며 줄 끝으로 가니 간신히 차례가 오기는 하겠는데 약국이 열릴 때까지 꼬박 기다려야 한다.

내 뒤로도 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전쟁 같다. 아니, 더 무기력한 전쟁이다. 다행히 사람들은 불편하나마 차례를 지켰고 간격을 유지하고 스마트폰 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다. 긴 시간 한자리에서 침착하게 상황을 견뎌내는 시민 의식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침착하던 긴 줄에 동요가 일어난 건 순간이었다. 약국에서 점원이 나와 마스크 수만큼 사람 수를 헤아렸을 때였다. 내 뒤의 댓 사람 정도에서 멈춘 점원이 ‘뒤에 계신 분들은 죄송하지만 돌아가 달라’고 하자마자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분명히 숫자를 세고 서 있는 거다, 분명히 앞에서 누가 새치기를 했다, 식구 하나만 서 있고 나중에 다 끼워주는데 약국 일처리가 왜 이 따위냐, 이걸 정책이라고 내놓는 게 이 정부라는 둥 온갖 험악한 소리가 쏟아지는 거다.

하루분 순번에 든 사람들은 여전히 침착했다. 뒤에서 어떤 아우성을 쳐도 돌아보는 일 없이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거나. 안과 밖 지점에서 극명하게 나뉜 두 분위기. 우리의 품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고작 입 가리개 하나라니. 어떤 범위에 들지 못해 불안증을 드러내는 것만큼 ‘나는 괜찮다’는 안전지대의 믿음이 보이는 외면 또한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적 마스크를 무사히 살 수 있게 된 나도 마찬가지였다. 뒤에 서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제외됐다면 어땠을까. 나라고 뭐 다르겠는가. 마스크를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가던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배제된 데 대한 분노를 참기 어려웠을 거다.

이성과 품위를 유지하는 기준에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작용함을 겨우 마스크 하나로 실감해야 하는 처지가 참 슬프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고 시민 의식을 유지하는 듯하나, 이 균형이 삐끗하는 순간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릴 위기의 순간을 용케 살아내고 있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며칠 전 KTX 승강장의 인상이 잊히지 않는다. 모든 일정이 취소돼 집에만 있다가 한 달 만에 나선 길이었다. 내 일정을 아는 지인들은 다들 한마디씩 했다. 요즘 누가 인터뷰 같은 걸 본다고. 웬만하면 집에나 있지.

그런 줄 누가 모르나. 사망자가 멈출 줄 모르고 자영업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은행 예치금이 뭉텅뭉텅 사라지는 현실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가 보고 싶었다. 단순히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 내가 아직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고, 간절히 어떤 희망을 좀 엿보고 싶었다는 게 맞을 거다. 누군가에게는 취미일 수 있는 책이나 집필 활동이 현실의 전부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3월 중순이라 해도 쌀쌀하고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KTX를 이용하는 승객이 줄었다는 뉴스를 접하기는 했는데, 출근 시간에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이 달랑 나 혼자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그 많던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세상이 멈춘 것 같은데 안녕들 하신지. 무사히 일상을 이어가고들 계시는지.

거대한 기차가 거의 빈 상태로 잠시 멈췄다가 떠나고 마스크를 쓴 역무원이 최소한의 동작을 하다가 사라지는 승강장에 비둘기들이 쏟아지듯 내려앉았다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장면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촉촉한 빗줄기로 뿌연 터널 끝이 텅 비었다. 이게 바로 유령도시구나. 접촉하는 순간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며 보균자로 돌아다니는 좀비가 돼 버렸구나, 우리 모두가. 영화 속 좀비는 흉측하니 알아보기라도 하지.

열차간에 들어가니 띄엄띄엄 앉은 승객들이 마스크를 쓴 채 눈까지 감고 있다. 철저하게 타인을 차단한 모습. 이해와 연대로써만 이 절망의 지대를 빠져나갈 수 있음을 알면서도,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참담하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마스크 쓰고 장갑 끼고서.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을 갖는 오월이나 유월 어느 날짜에 꼭 해야 할 일을 계획하기 위해서. 모쪼록 아무도 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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