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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필리핀처럼 떠날 수 있다

기사입력 | 2019-09-04 14:01

신기욱 스탠퍼드大 교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文정부의 동맹 중시 言行 상반
反日이어 反동맹 정책 가시화
민족해방론 수준의 ‘정세 文盲’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필자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워싱턴 조야에선 문 정부가 ‘노무현 2.0’인지 궁금해했다. 문 대통령은 워싱턴에 생소한 인물이었고, 노 정부 초기 조지 W 부시 행정부와의 갈등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노 대통령 친구이자 비서실장이었다는 점, 그리고 새 집권세력이 과거 반미 운동권 세력이라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이렇게 답변했다. ‘문 대통령은 신중한 분이고 노무현 학습 효과가 있어 미국을 자극하진 않을 것이다. 한·미 동맹도 중시할 것이다. 다만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부시 행정부에서 일했던 한 전직 고위관료가 반박했다. 그는 “문재인-도널드 트럼프 시기에 한·미 동맹이 파탄 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부시와 달리 동맹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의 새 집권세력은 더욱 급진적일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이 필자와 논쟁을 했던 이 전직 관료의 말대로 흘러가는 듯해 맘이 편치 못하다.

문 대통령의 안보관이나 접근법은 노 대통령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판했지만, 외교·안보정책에 있어서는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취했다. 본인의 소신이더라도 사실에 비춰 틀렸거나 국익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존심을 버리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중요한 동맹 사안에 대해선 핵심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실행에 옮겼다. 반면 문 대통령은 공개적으론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고 늘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나는 정책은 그렇지 않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결정만 해도, 국민 정서 측면에선 몰라도 국익 관점에서는 패착이다. 미국의 동북아 안보 틀인 한·미·일 삼각 공조를 흔들어 동맹에도 악영향을 주며, 결국 가장 큰 손해는 한국이 입게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이었다면 ‘자존심은 상하지만 국익을 위해 유지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이번 한·일 갈등의 단초가 된 것이 한·미·일 삼각 합의이기도 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한 양국의 입장 차이였는데, 결국 지소미아 파기로 삼각 공조의 균열이 가시화됐다. 이것이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말하는 “국익을 위한 외교적 공간의 창출”인지 이해할 수 없다.

현재 나타나는 한·미 파열음은 시간문제였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비슷한 백 그라운드를 가진 것도, 케미스트리가 잘 맞는 것도 아니다. 문-트럼프 행정부 사이가 썩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공개적으로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던 것은 대북 문제에 관한 한, 두 대통령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파기를 놓고 국무부, 국방부 등 해당 부처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덜 비판적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성격상 어느 날 갑자기 대북 강공책으로 전환하거나, 방위비 문제 등으로 한국을 강하게 압박할지도 모른다.

동북아 안보는 혼돈 그 자체다. 미·중 갈등, 북한의 미사일 실험, 치킨 게임으로 치닫는 한·일 갈등에 더해 미국의 리더십은 약화되고 있다. 문 정부가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큰 그림을 갖고 전략적 결정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현 집권세력이 아직도 1980년대의 ‘민족해방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정치공학은 익혔는지 몰라도 국제정세 읽는 법을 배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반미 목소리가 있었지만,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저류(底流)는 유지됐다. 이젠 그런 선을 넘은 듯하다. 반일(反日)도 모자라 반(反)동맹으로 가려는 것은 아닐까.

연구소 동료이기도 한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주(駐)필리핀 미국 대사(주일 대사와 국무부 차관도 역임)는 이렇게 말했다. “필리핀 정부와 국민은 미군이 나가지 않을 줄 알고 나가라고 했지만, 우린 떠났다. 싫다고 하는 나라까지 지켜줄 의무도 필요도 없다.” 100여 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던 필리핀에서도 떠난 미군이다. 한국이 필리핀의 재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문 정부는 “주도적 역량” “한·미 동맹 업그레이드” 등을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동맹이 국익에 우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 주도적 역량으로 동맹을 업그레이드할 건지 분명치 않다. 자칫 미군이 떠난 상태에서 핵을 가진 북한과 마주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엔 부시 행정부와 갈등이 컸지만, 후일에는 오히려 동맹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개석상에서 얼굴까지 붉히며 논쟁했던 부시 대통령이 얼마 전 봉하마을까지 찾아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구관이 명관일까. 참여정부의 맥을 잇는다는 현 정부의 외교 난맥상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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