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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명→1명… 일제때 끊긴 가양주 명맥

기사입력 | 2019-04-1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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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억 명에 육박하는 전 세계의 인구 중에서 50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20개다. 약 38억 명이 사용하고 있고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가깝다. 많은 언어가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해서 발전했지만 표현만 다를 뿐 ‘술’이라는 의미가 없는 언어는 없다. 이렇듯 술은 인간에게 가까운 존재였고 동반자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찰에서 빚던 술이 가정으로 전해지게 되고 집집마다 자기 집안에 맞는 가양주가 빚어졌다. 조선시대 내내 그렇게 이어져 오던 전통은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치하면서 바뀌게 됐다.

1904년 10월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대한제국 재정제도의 개편과 운영을 감독했다.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1905년 4월부터 우리나라의 주류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통감부에서는 1909년 2월에 법률 3호로 주세법을 시행했다. 모든 술 담그는 사람들을 면허제로 한다는 내용으로 소속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으면 술을 만들 수 없도록 했다. 술을 팔던 주막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제례를 위해 만들던 가양주까지 이 땅에서 이뤄지는 모든 술 제조에 제한을 둔 것이다. 이후 한일병탄으로 이어지면서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었다. 총독부는 1916년에 주세법을 주세령으로 고쳐서 시행했다. 그동안 자가용 술에 대해 무제한으로 제조를 허가했던 면허제는 이때부터 제한 면허제로 바꾸고 판매용으로 만드는 술보다 과세율을 높여서 자가용 술 제조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만드는 술보다 사 먹는 술을 싸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면허자가 사망했을 때에는 그 자손이나 상속자가 면허를 이어받을 수 없게 해서 집에서 빚던 가양주가 대를 이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당시에 어렵게 소식을 듣고 자가용제조 면허를 받은 사람은 30만 명이 넘었다. 당시에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고 대가족 형태였을 것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집에서 가양주를 빚어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우리나라 땅에는 술을 빚는 지역의 온도와 재료, 물의 성질에 따라 각각 지역적 특색에 맞는 30만 가지 이상의 술맛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가용제조 면허 신청자와는 반대로 판매를 위해 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면허의 상속을 인정하고 장려했다. 이듬해인 1917년부터는 판매용 술을 빚는 주류제조업에 대해서도 지역마다 주류제조업자를 새롭게 지정해 일반인들의 제조업 참여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1919년과 1920년, 1922년, 1927년, 1934년까지 주세법을 개정하면서 주세를 걷기 위해 주류제조 면허의 허가를 강력하게 제한했다. 이러한 결과로 1932년에는 자가용으로 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1명만 남게 됐는데 그마저도 사망하면서 1934년부터는 자가용 술을 빚을 수 있는 면허가 사라지게 돼 우리나라 가양주의 명맥은 일본이 설계한 대로 끊어지게 됐다.

이러한 규제와 단속은 밀주를 만들게 되고 일반인들이 범죄자로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판매용 주류를 제조하던 면허자들은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게 되면서 자본가로 성장했다. 술도 만드는 방법과 재료가 균질화되면서 독창성과 지역적 특색이 없어지게 됐다.

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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