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개인 연구실에서 문화일보와 창간 27주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 교수는 “나만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식의 이념의 강요가 정도를 넘어서면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북정책
안정적 평화관리로 전환필요

‘있는 그대로의 北’ 이해한뒤
보수·진보간 컨센서스 이뤄야

北核·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도
한미동맹 존중범위內 바라봐야

文정부 탈냉전적 발상은 ‘평가’
지나치게 남북관계에만 초점


이데올로기 갈등 완화 필수적
공존없인 민주주의 구현 못해

시위·광장정치로는 다수결 흔들
대의제 거치지않은 여론은 위험

조금 더 주고, 덜 받는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해결 가능한게 분배

경제 현실, 이론보다 중요한데
면밀파악안해 ‘정책 獨走’ 초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공존의 전도사다. 한반도에서 지체된 데탕트가 뿌리를 내리고 안정적으로 관리되기 위해서는 통일이라는 이상을 잠시 접어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지고지순의 가치로 인식돼온 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평화를 더 높은 가치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의 공존론은 국내에도 적용된다. 나만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식의 이념적 대립은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념의 강요가 정도를 넘어서면 내전으로 이어진다.

같은 맥락으로 분배 등 경제 정책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갈등’의 문제를 ‘나눌 수 없는 가치’의 문제로 전환해 절대화하면 협상을 통한 공존의 가능성을 봉쇄하게 된다. 결국 공존의 지혜는 상대를 인정하고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오후 종로구 내수동 최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 인터뷰 = 박민 부국장 겸 정치부장

― 국제적으로는 북핵문제 등으로 국내적으로는 양극화로 한국은 공존이란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냉전이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2개의 최전선이 형성됐는데 하나는 유럽의 독일이고 다른 하나가 동아시아의 한반도다. 독일은 전쟁의 책임이라도 있지만 한국은 식민통지까지 받았는데 해방 후 국민의 간절한 기대와 달리 냉전체제가 한반도에 그대로 이식되면서 분단됐다. 그리고 서로 적대적인 정권이 수립됐고 마침내 전쟁까지 경험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 북한의 핵개발 등으로 동북아는 다시 북·중·러와 한·미·일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남북 간에도 긴장이 심각한 수준까지 고조됐다. 이런 대립은 국내 정치로 이어져 여야 정당이 정치적 경쟁을 하는 수준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냉전 상태가 형성됐다. 사실 여야는 정책이나 국가운영 비전 등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적은 데 비해 이념적 갈등은 상당하다. 이처럼 동북아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 간에, 한반도 내에서는 남북 간에, 국내에서는 정치세력 간에 냉전 구도가 형성됐고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고 있다. 따라서 공존은 우리에게 필요성을 넘어 당위의 문제가 됐다. 평화와 안보,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공존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공존 없이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다.”

― 보수 진영에서는 최근 남북관계 개선과 미·북 정상회담 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남북한의 과거의 적대적 관계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교수님은 한반도 데탕트가 불가역적인 흐름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여러 근거가 있다. 우선 한반도를 제외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은 이미 1980년대 말 해체됐다. 이데올로기 경쟁을 하는 대립구조가 소멸된 것이다. 한국만 ‘냉전’이 녹지 않고 냉장고에 있다가 지금 밖으로 나와 해빙되고 있다. 데탕트로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되면서 생존 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이 혼자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일국체제’가 형성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중국 등 브릭스(BRICS)의 부상으로 미국의 비중이 축소됐다. 따라서 미국에게는 과거와 같이 냉전체제를 유지하거나 세계 질서를 기존의 방법으로 관리할 힘이 없다.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기존 세계전략을 뒷받침할 능력이 없다. 결국 미국은 개입을 축소하고 미국 중심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도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미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됐다. 북한 역시 최근 존립 위기 단계를 넘어서면서 국민의 경제 수준 향상 욕구가 커졌고 정권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런 조건과 상황 변화를 감안할 때 현재의 데탕트 분위기가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북한의 비핵화를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 수준으로 끌어내느냐 혹은 북이 미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체제 보장을 받을 것이냐는 외교적인 교섭과 협상의 문제다.”

― 상대적으로 지체된 한반도의 데탕트 흐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했던 방식, 즉 북한을 고립시키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북 정책, 통일 정책으로부터, 평화의 안정적 관리를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이 전환돼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보다 더 우선하고 높은 가치는 평화다. 이런 인식 전환을 위해 우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식의 가치 판단을 배제해야 한다. 둘째는 평화지향적 대북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보수든 진보든 어느 한 진영만의 노력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다. 양측의 컨센서스가 필요하다. 셋째,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에서 한국이 독자적인 플레이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 그런 기준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비핵화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문재인 정부가 전향적이고 탈냉전적인 사고나 발상을 통해 북한에 접근하고 비핵화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미국의 대북 정책, 한반도 정책이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보조를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과 북한의 데탕트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은 북핵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당사자이고 당사자가 데탕트를 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미국으로서도 대북정책에서 한국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는데 미국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일련의 변화에서 중요한 액터이자 플레이어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가 굉장히 좁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나치게 남북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미 동맹을 존중하고 그 범위 내에서 미국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의 주요 당사자가 대북 제재와 같은 협상 레버리지를 다 보여주면서 분위기 조성에 나서는 것은 굉장히 나이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그런 점 때문에 한·미 동맹 문제나 협상전술 차원에서 우려가 제기되는 것 같다.

“결정적으로 시야가 좁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일본과의 관계다. 동북아시아 문제에서 일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고 크다. 미국에는 못 미치겠지만 미국 다음으로 영향력이 크다.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중국도 중요하지만 우리와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과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여서 팔이 북한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반면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다. 그리고 평화헌법 때문에 원칙적으로 무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의 팽창은 일본에 위협이 된다.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대립이 대표적 예다. 결국 북핵과 중국의 팽창이란 환경에서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셈이다.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동북아에만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본은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보조를 맞출 수 있다. 미국을 설득할 일이 있는데 우리만으로 힘에 부치면 일본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 물론 일본과는 예민한 민족문제가 걸려 있다. 그러나 일본의 중요성을 감안해 민족문제와 외교안보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앞으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일본에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

―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과 관련, 국내에서 컨센서스를 이끌어 내는 데 무관심하거나 취약하다는 우려도 있다.

“한반도에서 남북 간 적대 관계를 평화공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완화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내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변화는 시작될 수도 없고 지속될 수도 없다. 햇볕정책이 실패하는 과정이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외교정책에 보수세력을 참여시키고 나아가 동반자로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갈등과 대립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정당이 플레이어로서 교섭하고 협력하고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촛불집회 이후 모든 문제를 자꾸 제도권 밖으로 끌고 나가 시위정치, 광장정치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래선 안 된다. 이념적 갈등이 제도권 내로 수렴되지 못하고 거리로 나와 강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면 그건 다수결로 해결할 수 없고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평화를 추구하려면 이념적 갈등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고 열정의 분출을 이성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면 통일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평화공존과 통일은 병립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게 저의 명제다. 냉전 시기 남과 북은 모두 통일을 지향했다. 우리는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 목표였고 북한은 우리를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과 북이 서로 정통성 경쟁을 했다. 같은 상황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다. 사실 지난 70년 동안 통일은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처럼 간주됐다. 그러다 보니 핵위기 국면에서 많은 사람이 평화공존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통일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평화공존에 장애가 되고 평화공존을 안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가치와 통일을 지향하는 가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평화 그 자체에 가치를 둬야지 성공할 수 있다. 상대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상대 체제가 좋아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가치만 강조하면 상대도 우리 가치를 수용할 수 없다. 이게 평화공존의 원리다. 그래서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은 평화공존이 안정적으로 제도화할 때까지 좀 접어둘 필요가 있다. 이 정도면 통일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판단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는데 난 내 세대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본다. 그런 차원에서 통일비용을 이야기하거나 유라시아 대륙철도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본다.”

― 국내적으로 공존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각종 정책에서도 컨센서스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 평화공존 문제를 얘기할 때도 언급했지만 이데올로기 갈등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같은 문제의 핵심은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앨버트 허시먼이라는 경제이론가는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으로 분류했다. 민족문제나 이데올로기 갈등이 후자에 속한다면 분배와 같은 문제는 나눌 수 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해결 가능하다.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구조에서도 조금 더 주고 조금 덜 받는 식으로 협상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런 문제들조차 ‘가치’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정도의 문제인 경제정책을 선악의 문제화해서 이건 꼭 해야 하고 이건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니까 독주를 하고 배제를 하게 된다. 최저임금제나 근로시간단축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규제나 소외계층 배려 등의 가치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필요한 경제적 현실에 대한 면밀하고 정확한 파악이나 이해가 부족했다. 이미 드러났지만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실업자, 비정규직 등의 사정이 모두 다르다. 사실상 이론보다 이런 현실이 더 중요하고 그걸 잘 가늠해서 정책 결정을 해야 하는데 원칙을 바로 현실에 적용했다. 이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접근조차 못하고 발목이 잡혀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런 데 대한 안목이 부족한 것 같다.”

― 최근 포퓰리즘이 세계화되면서 민주주의 위기론도 확산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갈망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등장했는데 국정운영 시스템을 보면 포퓰리즘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거, 정당, 의회 등 제도화된 정치과정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요구나 의사가 대표되는 것이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면 포퓰리즘은 기존 제도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헌법기관과 국가기관을 우회해 사회의 요구와 힘과 열정을 동원한다. 즉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 포퓰리즘이 나타난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청원이나 이런 걸 내세워 법을 만들거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전형적인 직접민주주의 행태인데 포퓰리즘적 요소와 맞닿아 있다. 대의제를 거치지 않고 특정 이슈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열정이 그대로 분출되고 이런 여론이 강력한 압박이 되면서 사법부가 법률에 따른 판단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입법과정이나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힘을 제어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건 결코 잘하는 일이라 보지 않는다.” minp@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