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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정사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 김기영의 ‘하녀’(1960), 로렌스 캐스단의 ‘보디 히트’(1981). 세 작품의 공통 키워드는 ‘악녀’다. 각기 다른 이유로 악녀가 돼버린 주인공들이지만 영화가 악녀를 설정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유사한 요소가 있다. 대체로 그들은 미인이고, 이방인이며, 성적·사회적 욕구가 강하다. 그렇기에 종국에는 파멸을 맞으며 퇴장한다. 애드리안 라인의 1987년 작 ‘위험한 정사’(사진)에서도 이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는 악녀가 등장한다. 이 영화의 악녀는 이전 악녀들보다 위험하고, 파격적인 결말을 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변호사 댄(마이클 더글러스)은 아름다운 아내 베스(앤 아처)와 귀여운 딸을 낳고 사는 성공한 남자의 전형으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회사에서 열린 이브닝 파티에 베스와 함께 참석한 댄은 바를 서성이다가 자신의 로펌이 변호를 맡고 있는 출판사의 부사장 알렉스(글렌 클로즈)와 마주친다.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베이지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에 깊은 눈을 가진 알렉스에게 머문다. 댄은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결국 훔쳐보는 무리에 끼어든다. 알렉스는 유독 댄의 시선에만 미소로 응답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댄은 긴급회의 참석차 회사로 향하고 베스와 딸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있는 교외로 여행을 떠난다. 회의장에서 댄은 알렉스의 예상치 못한 참석에 놀란다. 두 사람은 며칠 전 나눴던 은밀한 시선을 기억하고 있다. 회의 후 저녁 자리에서 알렉스는 댄에게 “아내는 오늘 들어오지 않을 거고, 우리는 성인이잖아요”라는 노골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그를 아파트로 초대한다. 두 사람은 아파트에 들어가자마자 서로를 벽으로 밀치며 짐승처럼 으르렁댄다. 서로를 물고, 옷을 찢어내 상위를 점령하려 드는 것이 마치 포유류의 성찬을 보는 것 같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던 댄에게 부족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유순한 아내와는 상상할 수 없었던 거칠고 짐승 같은 섹스. 서로를 내던지고 핥아대는 그런 섹스 말이다.

라인 감독은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10여 작품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는 1980년대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험한 정사’는 ‘플래시 댄스’와 ‘나인 하프 위크’에 이어 라인 감독의 정점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처럼 섹스 신을 자극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찍는 감독은 없다. 그런 이유에서 이 칼럼에도 가장 많이 등장했다. ‘나인 하프 위크’ 편에서도 언급했듯, 그의 섹스 신에서는 물성이 두드러지는 소품들이 이용되는데, 댄과 알렉스의 정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알렉스를 싱크대 위에 앉혀놓은 채 이뤄지는 정사 신에서 알렉스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넘치게 만든다. 중간중간 수돗물을 몸에 뿌리고 댄이 받아 마시게 하는 장면은 전작 ‘나인 하프 위크’에서 등장했던 ‘푸드 섹스’만큼이나 자극적이다.

이 영화가 라인 감독의 전작과 다른 점은 수위 높은 정사 신을 재현하면서도 중반부를 넘기면서 스릴러 장르로 전복한다는 것이다. 알렉스와 잊지 못할 주말을 보낸 댄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집착증이 심한 알렉스는 자신이 댄의 아이를 가졌고, 그의 가정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한다. 전화를 피하는 댄에 대한 형벌(?)로 알렉스는 그의 차를 망가뜨리거나 집에 침입해 댄의 딸이 기르던 토끼를 죽여서 끓여 놓고 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알렉스의 아파트로 찾아가 한바탕 몸싸움을 한 끝에 댄은 베스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다. 베스는 댄을 쫓아내고 별거를 시작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이들은 다시 결합한다. 하지만 알렉스는 댄의 집으로 찾아와 베스를 살해하려 든다. 베스는 결국 총으로 알렉스를 쏴 죽인다. 그렇게 악녀는 단죄된다.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알렉스에 대한 배경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신도, 과거도 밝혀지지 않은 채 그는 섹시하고 집착적인 관념적 인물로만 기능하고 버려진다. 할리우드식 권선징악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쓰러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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