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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화된 ‘남성性 신화’ 깨부수기

엄주엽 기자 | 2018-08-31 11:06

- 테스토스테론 렉스 / 코델리아 파인 지음, 한지원 옮김 / 딜라일라북스

남성이 여성보다 더 문란하고
위험감수·경쟁적이라는 논리
진화·신경과학 연구 토대로
조목조목 사례 들어가며 비판

사회적 문제도 생물학 들먹이고
性불평등=자연현상 치부하는
‘테스토스테론 결정론’에 反旗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시사평론가들은 “월스트리트에 테스토스테론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면서 남성들이 거의 장악한 금융계 고위직에 여자를 더 많이 앉혀야 한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분비되는 남성이 고위험, 고수익 전략 위주의 모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금융 고위직을 맡겼다면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며 복합 신용 파생상품 따위에 그렇게 무모하게 투자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파산한 ‘리먼 브러더스’를 ‘리먼 시스터스’나 ‘리먼 시스터스 앤드 브러더스’로 바꿨다면 괜찮았을까. 언뜻 성 평등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테스토스테론이 남녀의 본질적인 특성을 결정한다는 오래고 일반화된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 바탕이 이 책의 저자가 ‘테스토스테론 렉스’라 부르는 거대한 신화이다. 남성의 대표적인 성호르몬으로 불리는 테스토스테론에, 한때 지구상 육식동물의 최강자였지만 지금은 멸종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더한 용어다. ‘뇌 마음대로’와 ‘젠더: 만들어진 성’ 등의 저서로 국내 독자에게도 익숙한 코델리아 파인 호주 멜버른대 과학사학·과학철학 교수는 지난해 영국왕립학회 과학도서상을 수상한 이번 책에서 학술적, 대중적 담론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이제는 서서히 멸종해 가고 있는 ‘테스토스테론 결정론’이라는 성 본질주의적 관점을 과학적으로 뒤흔든다.

이 신화는 생식에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진화에 성공한다는, ‘성 선택’이라 불리는 일종의 자연 선택이 성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만들었다는 진화생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남성은 문란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경쟁적인 성으로 진화했으며, 이런 자질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물질적, 사회적 자원을 가장 잘 축적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결국 생식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호르몬으로 인해 남자와 여자의 ‘뇌’와 ‘본성’ ‘행동’은 성차를 갖게 됐고, 심리학적으로 남녀는 거의 다른 종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직장 안팎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성 격차도 ‘차별’이 아니라 ‘테스토스테론’ 때문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로, 사회적인 문제까지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시켜 성 불평등을 마치 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예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로 가르고, 그 고유의 자질을 인정하는 게 개인의 행복과 사회·직장의 발전에 적합하다는 주장이 난무한다.

저자는 진화과학, 심리학, 신경과학, 내분비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테스토스테론 렉스’라는 신화를 깨부순다. 예컨대 수컷이 암컷보다 문란한 종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동물 종에서도 일반적이지 않고 다양하다. 상황에 따라 암컷과 수컷이 생식에 적극적이었다가 소극적으로 변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남성이 여성보다 일회성 섹스 제안에 훨씬 관심을 보인다는 연구가 있지만, 하룻밤 섹스로 감수해야 할 평판상의 피해나 예상되는 성적 만족도 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은 간과됐다. 저자는 남녀의 문란함을 다른 기준에서 평가하는 성적 이중 잣대야말로 남성의 문란함을 조장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위험 감수 자체가 남성적 특징이라는 믿음도 본질적이지 않다. 위험 감수는 위험을 창조하고 통제하는 힘이 있고 위험에서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일수록 선호한다. 백인 남성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위험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성 평등이 진전된 스웨덴에서의 실험에서 위험 감수의 성차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백인과 비백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험 감수의 격차가 성 차이가 아니라 지배적인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증거다. 경쟁적인 성격도 이와 유사하다.

저자는 “테스토스테론 렉스는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도 그것이 성 불평등에 미치는 끈질긴 영향력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 이젠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어쩌면 지금은 덜 점잖고 더 파괴적이 돼야 할지 모른다. 말로 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행동이 더 나은 법”이라며 “그 같은 선택은 우리(여성)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위한 문제이지 과학을 위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318쪽, 1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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