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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경희대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火病전문가

화병은 분함에서 비롯돼
개인 탓하기엔 환경 나빠

용서한들 다시 기억속으로
현실로 찾아오는 억울함

진정한 용서의 길 가려면
사회가 투명·공정해져야

화병클리닉을 방문한 50대 여성은 평생토록 자신을 화나게 한 이야기를 벌써 30분 동안 계속하고 있다. 시부모의 구박, 남편의 외도, 이제 좀 컸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자녀…. 이야기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는 하소연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혼을 하기엔 너무 늙었고, 또 이혼한다고 해서 한 맺힌 자신의 억울함이 풀릴 것 같지 않다며 답답한 가슴을 치면서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넌지시 “용서할 수 있겠어요?” 하니, “벌써 수도 없이 용서했었노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용서한들 다시 기억 속으로, 또 현실 속으로 찾아오는 억울함과 분함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화병(火病) 치료의 마지막을 용서라고 하는데, 그는 진짜 용서를 한 걸까?

요즈음 가슴에 한을 품고, 억울함과 분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지면과 방송을 뒤덮고 있다. 화병은 비단 진료실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료실 밖의 화병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우리의 모습을 조금만 들춰봐도 화병은 사회 곳곳에서 관찰된다. 이러한 화병의 세상에서 이제 화해와 용서를 해야 할 때라는 말들이 들린다. 진료실에서 말하는 용서가 과연 사회에서도 가능할까?

화병은 일차적으로 억울함과 분함이라는 환경에서 시작한다. 화병클리닉에서 털어놓는 사연을 듣다 보면 그 같은 환경에서 화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중년의 여성 화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상담 장면을 몇 번 보고 나서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학생들의 하소연을 듣기도 한다.

화병이 악화하는 두 번째 문제는, 환경에 대한 환자의 평가이긴 한데, 그 환경이 너무 나빠서 환자 탓을 하기 어렵다. 다만, 오랜 기간 화를 풀지 못하고 담아 놓고 견뎌 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대로 남는다. 조금 일찍 풀어낼 수 있었다면 이렇게 병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화병 환자의 고통은 가슴 답답함이나 치밀어 오름과 잠을 못 자고, 식욕이 없고, 무기력하고, 불안한 증상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사건을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몸의 증상은 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다. 그리고 증상은 다시 고통스러운 기억과 분노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치료는 일단 증상의 개선에서 시작한다. 답답함과 치밀어 오르는 양상이 줄어들고, 식욕이 생기고 잠을 조금 자기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증상이 조금 가벼워지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도 이전보다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대할 수 있다. 조금 더 치료가 되면 과거의 기억에서도 조금은 긍정적인 요소를 찾고, 힘들었던 기억을 회상하면서도 한숨을 덜 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지없이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면 치료는 어느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화병 치료에서 용서는 진료가 거의 끝날 무렵 다루는 주제다. 그나마 치료가 어느 정도 되어 마지막 남은 끈과 한을 털어내는 그 시점에서 비로소 용서라는 말이 나온다. 나에게 억울하고 분함을 준 대상자에 대한 용서, 그리고 그 대상자로부터 상처받아온 나에 대한 용서다.

이렇게 명제로 보면 간단하지만, 용서는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환자에게 겨우 살렸던 따듯한 마음의 불씨가 용서하는 문제에 접어들었을 때 여지없이 무너지고, 다시금 분노의 활화산이 타오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잘못된 용서는 되레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라는 장면에 접어들어, 우리는 잘못된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한다.

△너무 힘들어서 문제 해결을 하지 않은 채 포기하듯 해 버리는 ‘성급한 용서’가 있다. 오랜 기간 겪으면서 해결하지 못하고 끌고 오다가 자신이 힘들어서 용서에 동의해 버리는 경우다.

△종교 활동이나 상담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강요된 용서’가 있다. 용서가 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와 도덕·종교가 집요하게 동의를 바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다.

△잘못을 나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병적 용서’가 있다. 벌어진 일에 대한 생각을 반복하면서 내 잘못으로 일이 벌어졌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상대방을 용서하는 경우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야 하면서 용납해 버리는 ‘묵인하는 용서’도 있다. 사회 통념상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타협하면서 자신이 그 고통을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며 하는 용서다.

△용서해야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짓 용서’도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용서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용서는 오래가지 않는다. 실제로 용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그렇게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상처가 깊고 클수록 용서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용서할 마음이 진정으로 들었는가?”

“사실은 명확하게 밝혀졌는가?”

“상대방의 진실한 사과가 있는가?” “사과가 없다면 상대방의 잘못이 충분히 인정됐는가?”

“상대방과 나는 독립된 대등한 관계인가?”

“상대방으로부터, 그리고 나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나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화병클리닉에서 만난 환자와 사회에서 만난 억울한 사람은 화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진정한 용서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투명하고 공정해져야 한다. 화병의 치유를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등한 관계가 되는 사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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