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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던 유년 ‘배 타고 이놈의 나라 뜬다’ 다짐… 海運인연 시작”

박수진 기자 | 2018-03-14 11:18

김현겸(57) 팬스타그룹 회장 겸 대한민국해양연맹 총재가 지난 5일 서울 중구 무교동 팬스타그룹 서울사옥에서 한류테마 ‘코리아 크루즈’ 등 정통 크루즈산업 육성 의지 등을 밝히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김현겸(57) 팬스타그룹 회장 겸 대한민국해양연맹 총재가 지난 5일 서울 중구 무교동 팬스타그룹 서울사옥에서 한류테마 ‘코리아 크루즈’ 등 정통 크루즈산업 육성 의지 등을 밝히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첫 민간인 출신 해양연맹 총재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

껌 팔아 초등 육성회비 내고
야간中 땐 사환 일로 돈 벌이
“바다 위 배 바라보며 꿈 키워”

대학 땐 다방 돌며 유자 판매
“공손히 머리 숙이는 법 배워”

결혼 뒤 집 담보로 회사 차려
우주를 아우른다 ‘汎星’ 명명
그것이 현재 ‘팬스타’의 기원

2002년 400억 들여 배 구입
“韓국적 달고 日 갈 때 못잊어”

“경제·군사도 해양력 필수인데
우리나라는 바다를 너무 무시
美 모델로 해양연맹 키울 것”


흙수저 샐러리맨에서 시작해 28년 만에 연 매출 2000억 원대의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종합해운물류기업을 키워낸 사람이 있다. 지난 2월 해군참모총장이나 해양수산부 장관이 맡던 대한민국해양연맹 총재에 민간 기업인 최초로 선출된 김현겸(57) 팬스타그룹 회장이다. “나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며 “해운업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와야 한다”는 김 회장을 지난 5일 서울 중구 무교동 팬스타그룹 서울사옥에서 만났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지점 설립 현황을 돌아보고 하루 전날인 4일 귀국해 피곤할 법도 했지만 그는 2시간 30분이란 긴 인터뷰 시간 동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사업을 시작한 계기와 성공담, 고난과 역경, 팬스타그룹 회장과 해양연맹 총재로서 포부를 열정적으로 들려줬다.

김 회장은 6남매 중 막내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쉰 살이 넘어 본 늦둥이였다. 단란했던 가정이 무너진 건 김 회장이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6학년에 올라갈 무렵이었다. 빚쟁이들이 학교까지 찾아와 “아버지 어디 가셨느냐”며 진을 치고 앉았고, 육성회비를 못 내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어머니와 큰형은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도망 아닌 도망’을 가고, 세 살 많은 바로 위 누나와 함께 아버지 친구 집에 맡겨졌다. 김 회장은 “가난 탓에 철이 빨리 들었다”며 “아버지 친구가 차비로 쓰라며 준 돈으로 친구들과 껌 장사를 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육성회비를 냈다”고 말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야학과 비슷하게 운영되던 공민학교에 들어갔다. 공민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동아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고, 공부를 잘해 사환으로 검역소나 은행에서 일하며 용돈 벌이를 했다.

유년 시절 힘겨웠던 삶은 상처와 한으로 남았다. “무시를 많이 당했어요. 이놈의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이 그의 꿈을 키웠다.

“사환 일이 끝나고 집에 걸어가는 길에 늘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봤습니다. 배를 타고 선장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절박함으로 한국해양대에 지원하려던 김 회장은 원서를 쓰러 갔다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시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 탓이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김 회장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서를 파는 직원에게 “이 학교는 대단한 학생을 놓친 것”이라고 소리치며 돌아섰다.

해양대 진학의 꿈을 접고 일단 부산이라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김 회장은 돈을 잘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성균관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건설업계의 중동 붐이 거셌던 시기였다.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역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그때 해운론을 처음 접했다. “국외 거래를 하려면 해운을 알아야겠더라고요. 해운론을 배우며 무역 실무를 익혔지요.”

코흘리개 시절 껌을 팔아 용돈을 벌던 실력은 대학 시절에도 이어졌다. “큰누님이 유자밭을 샀는데 유자가 잘 안 팔리는 거예요. 내가 좀 삐딱하고 반항적인 면이 있었거든요. 큰 형님이 ‘공부도 안 하니 큰누님을 도와서 유자나 한번 팔아보라’고 해서 유자 팔기에 나섰습니다.”

친구, 후배들을 모아 유자 직거래를 시작했다. 김 회장은 “다방에서 유자를 고르는 건 주인이 아니라 주방장이더라”며 “주방장 친목 모임에 가서 소주도 사고 하니 명동에 있는 다방마다 금세 우리 유자가 다 깔렸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라고 하면 먹어줬거든요. 공손하게 하니 주방장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머리 숙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깨달음은 또 있었다. “돈이 들어오면 친구들하고 술 사 먹고 급기야 빚까지 생긴 겁니다. 돈이 들어오더라도 내가 갖는 돈은 10%도 안 되니 쓰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 터득했습니다.”

무역 공부를 하면서 해운회사에 다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무역회사에 다니던 큰 형님 소개로 일본계 해운회사 한국대리점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이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반일 감정이 컸다. 그러던 차에 큰 형님 친구가 본인이 운영하는 해운사로 오라고 제의해 직장을 옮겼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당연히 선박이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 회사는 ‘무선박운송인 회사’였다. 선박회사의 화물 싣는 공간을 100원에 사서 화주에게 120원에 되파는 식의 영업을 하는 ‘포워더사’였던 것이다. 회사를 차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퇴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회사 사장이던 큰 형님의 친구가 거래처 인력을 빼내 같은 유형의 공장을 짓고 있던 것이다.

김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항상 되뇌는 게 ‘붕정만리 기불탁속’(鵬程萬里 飢不啄粟·큰 새는 먼 길을 날아가는 도중 배가 고파도 좁쌀은 쪼아먹지 않는다)”이라며 “신의를 저버리면 업보가 다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월급쟁이 2년 만에 김 회장은 결국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경기 군포시의 신혼집을 저당 잡힌 돈 2000만 원 등 5000만 원을 모아 지인들과 ‘범성’이란 포워더사를 세웠다. 만 29세 때다. “내가 지금도 마누라한테 잡혀 삽니다. 남들이 잘 모르는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그마저 관둔다니 집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습니까.”

회사 설립 당시 포부가 컸다. “범양상선(지금의 팬오션)을 보고 ‘저 친구들은 바다를 아우른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으니 나는 더 크게 전 우주를 아우르자’며 ‘범성’이라고 지었습니다. 그걸 영어로 바꾼 게 지금의 팬스타예요.”

창립 초기 국내 무역회사가 1만 개 정도였는데 전 직장에서 거래하던 200여 개는 놔두고 나머지 9800개사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 달에 컨테이너 100개만 따오자 싶었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김 회장은 컨테이너가 있는 회사 사장 집을 무작정 찾아갔다. “생면부지인 사람이 집까지 찾아와 뭐하는 짓이냐고 역정을 내던 분들도 ‘근성을 높이 산다’며 결국 일감을 주시더라고요.”

1992년 롯데월드 기구·설비, 2000년 여천 LG-DOW 폴리카보네이트 공장 산업기계 운송 등 온갖 분야의 화물 운송을 도맡았고 1990년대 후반이 되자 국내 5대 포워더사로 우뚝 섰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위기 때도 운임으로 받은 달러가 가득했을 정도였다.

먹고살 만해지니 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더 커졌다. 국내 컨테이너 선사들의 담합에 밀려 전용 화물선인 컨테이너선 대신 여객과 컨테이너를 같이 실어나를 수 있는 카페리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일본에서 건조한 지 5년이 채 안 된 선박을 김 회장에게 팔고 싶어 했고, 400억 원을 들인 첫 선박 ‘팬스타드림호’가 2002년 김 회장의 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국적선으로 등록한 팬스타드림호가 출항해 일본 세토(瀨戶)내해를 지날 때 느꼈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초기 영업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화주들이 화물운송 중개만 하던 팬스타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화물칸이 텅텅 빈 채 출항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며 “한 번 운항할 때마다 수천만 원씩 손해를 봐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적자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1999년 설립한 일본 현지법인 ‘산스타라인’을 통해 일본 통관면허와 철도운송면허를 취득해 통관절차를 줄이고 해상·철도 운송을 연계하니 한·일 간 4일 이상 걸리던 운송시간이 2일로 확 줄었다. 항공운송비의 16~20%로 저렴한데 운송시간은 비슷하니 화주들도 화물을 맡기기 시작했고 취항 1년 6개월 만에 이익이 났다.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여행객과 물동량이 대폭 늘었고 2007년 ‘팬스타써니호’, 2008년 ‘팬스타허니호’까지 들여와 크루즈 사업을 본격화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내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그는 “1년 만에 400억 원의 적자를 냈고 회사 부채를 다 합치면 800억 원 규모에 달했다”며 “부산 중앙동에 팬스타가 망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실제로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이 인수에 나선 상황에서 ‘흑기사’가 등장했다. 팬스타그룹의 가장 큰 채권자인 일본 ‘리베라그룹’이었다. 김 회장과 오랜 친분을 쌓아 왔던 리베라그룹에서 “한국 채무를 모두 갚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화끈하게 도와주더라고요. 우리 회사를 좋은 회사로 본 것 같았어요.” 다른 채권자들의 태도도 슬슬 변하며 채권 상환압박이 급격히 줄었다. 팬스타써니호는 중국 코스코에 팔고, 팬스타허니호는 매도인에게 반환해 자금을 마련했고 경기 호전과 함께 사업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면서 5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일구고 위기에 빠졌을 때 외국 기업까지 손을 내밀었을 정도면 김 회장의 인맥관리에 특별한 비법이 있지 않을까. 평소 사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질문에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관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그는 “쓸데없는 인간관계는 안 만든다”며 “다만,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절대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에게 떡값 대신 진짜 떡을 돌린 얘기는 유명하다. 김 회장은 “해운업계에는 커미션을 주는 관행이 있는데 나는 공무원에게 돈 주는 걸 제일 싫어한다”며 “(뇌물받다가) 인생 망치는 똑똑한 공무원을 많이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떡값 대신 진짜 떡을 돌려 초반에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다”며 웃었다.

성공한 인생인 김 회장에게 남아 있는 꿈은 뭘까? 김 회장은 “사실 몇 번을 도망치다가 맡게 된 것”이라며 해양연맹 총재직을 수락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바다를 너무 무시한다”며 “바다를 포기하는 건 결국 나라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양 관련 학술연구도 미진하고, 해양안전교육이나 해양관광·레저문화도 열악한 수준”이라며 “관선, 상선, 어선, 화물선, 유람선 등 바다 위에 떠 있는 모든 배가 평소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양력을 키워놔야 하는데 조선은 산업통상자원부가, 해운은 해수부가 나눠 맡으면서 해운 관련 기관과 조선 관련 기관 간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커지려면 해양력이 필수적”이라며 “미국 해양연맹을 모델로 삼아 해양분야를 선도하도록 해양연맹을 키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해양 관련 단체들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연맹을 중심으로 의용해난구조대를 조직해 해난사고가 났을 때 보다 신속한 구조활동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며 “다양한 활동을 위해선 재정이 안정돼야 하고, 솔선수범하기 위해 발전기금 1억 원을 내놨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정통 크루즈 산업을 육성하고 팬스타그룹을 동북아·태평양 연안의 물류, 여객을 주도하는 국제적 종합물류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고 역설했다.

박수진 기자 sujininva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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