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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난생처음 강원도 평창이란 고장을 다녀왔다.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린다는 그 평창이다. 생각해보니 아니다. 평창은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이므로 이효석문학관을 찾아 한두 차례 가 보았지 싶다. 그런데도 이번에 찾은 평창은 전혀 새로운 평창이고 난생처음 본 평창이다.

실은, 이번 평창 방문은 목적 있는 방문이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한·중·일 시인대회가 평창에서 개최되어 거기에 다녀온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면서 이를 알리는 동시에 동양 삼국의 문화적 우의를 다지기 위해 한국시인협회가 마련한 자리였다.

특별했다. 장소가 우선 특별했다. 알펜시아란 이름의 리조트. 나에겐 리조트란 말 자체가 낯설고 그런 곳에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다. 그러니 특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깊은 산속인데 하나의 조그만 도시처럼 되어 있다. 마치 캐나다 어디쯤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계절이 특별했다. 9월 중순, 아직은 반팔 차림이 편안한 계절인데, 산속이라 그런지 벌써 초가을 날씨였다. 입고 간 여름 양복이 썰렁하여 마련해간 머플러를 꺼내어 두르고 다녀야만 했다. 서둘러 심은 듯한 키 큰 자작나무 높은 가지에 바람이 스산하여 더욱 낯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행사가 특별했다. 김남조 선생을 비롯하여 우리 한국에서 참여한 시인들이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이었고, 중국과 일본에서 온 시인들도 실력 있는 시인들이었다. 평화·환경·치유 등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를 읽고 주제에 따른 논의를 깊이 있게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며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실은 나는 그동안 시인협회와 같은 문학단체 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러므로 한참 만에 만나는 시인이 많았다. 특히, 동료 시인들과 선배 시인들. 많이들 변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짱짱한 모습도 있었지만, 많이 기울었고 노쇠한 모습들이 더 많았다. 아, 저 모습이 내 모습일 텐데,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짠해 왔다. 이런 기회에 이런 모습으로 우리가 앞으로 몇 번을 더 만날 것인가!

행사의 객관성이나 사회성을 떠나 그냥 우리로서는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고 몇 마디 스쳐 지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새롭고 가치 있으며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인생은 마냥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므로 새롭고 특별하고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기만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로서는 그곳에서 만난 한 젊은 남성이 특별하고 의미 있었다. 문단 데뷔 이래, 시골 출신이면서 시골에 눌러사는, 철저히 시골 시인이었던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시골 시인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또 그들과 나름대로 교유하면서 살았다. 또래 시인들로 특히 이성선, 송수권, 최명길과 같은 시인들이 좋았다.

송수권은 호남 쪽이고 이성선과 최명길은 강원도 쪽이다. 그러기에 강원도, 특히 속초나 강릉에 들르면 그들을 만나야 했고, 행사가 자주 열리는 백담사에 가면 어김없이 그들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세월 좋았고 평화로웠으며 우리들 세상이 오래 갈 것 같은 느낌으로 세상을 살았다.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런데 이성선 시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최명길 시인이 뒤를 따랐다. 그러고는 송수권마저 지난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송수권은 남녘 시인이라 그렇다지만 나로서는 이성선과 최명길 그 두 사람이 강원도 시인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어쩌면 강원도 자체였는데 그만 강원도 전체가 썰렁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주 낯선 장소, 낯선 행사, 낯선 시간에 그 깊은 산속에서 최명길 시인의 큰 아드님을 만난 것이 아닌가! 최선범 씨. 아버지가 돌아가고 나서 시인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하여 요즘 세상 보기 드문 효자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그 최선범 씨를 문득 만난 것이다. 바로 우리가 들어서 행사를 하는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일하면서 행사 업무와 홍보 업무를 관장하는 차장이라 했다.

놀랍고 반가웠다. 그동안 강원도가 텅 빈 것만 같았는데 그 텅 빈 강원도가 최선범 씨 한 사람으로 꽉 차오르면서 금세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젊은 남자는 아버지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부드럽고 둥근 목소리가 닮았고 유순한 얼굴 표정과 눈빛과 점잖은 몸가짐이 닮았다. 마치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산다는 산양 같다고나 할까. 반갑고 기뻤다. 젊은 남자는 마치 나에게 자기 아버지 대하듯 공손했고 모든 일에 세심했다. 선량했다. 아, 이 사람이 바로 강원도구나. 그는 가까이 다가와 낮은 음색으로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고, 자기 아버지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자기 아버지의 문학적 업적을 현창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그냥 기쁘고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마냥 그 사람이 내 아들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서 바로 이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것이다. 우연한 기회, 우연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이 필연이 좋은 것이고 감격스러운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은 이렇게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이루어지고 새롭게 방향을 잡아 흘러가게 되어 있다.

처음 나는 환희란 말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환희까지는 아닌 것 같아 기쁨이란 말로 고쳐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꺼움이란 말로 고쳐 보았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네 삶은 이렇게 기껍고 감사한 구석이 있어 하루하루가 살 만하고 기대할 만한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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