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 송재우 기자 jaewoo@munhwa.com

(43) 사회학자 정수복이 걷는 국립중앙도서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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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5월이다. 오후 2시 30분. 집을 나서면 아파트 담장의 넝쿨 장미가 붉은 꽃을 풍성하고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나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서초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한다. 파리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학자이자 작가가 되어 귀국한 이후 나의 서울 생활은 매우 단순하다. 오전에는 집에서 책을 쓰고,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책을 읽다가 하루를 마감한다. 늘 책과 함께하는 작가 생활은 정신의 집중을 요구한다. 책 속의 문자와 씨름하다 보면 눈은 붉게 충혈되고 몸에서는 생기가 빠져나간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눈의 피곤함을 씻고 몸의 활기를 되찾는 방법이 있다. 저녁 6시, 도서관 열람 시간이 끝나면 나는 읽던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 뒷산에 오른다. 물기 오른 나무들이 정답게 맞아주는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쪼르륵하는 방울새의 지저귐이 귀를 즐겁게 한다. 멧새와 종다리와 딱따구리의 소리도 들리고 때로는 숲 속을 날아다니는 꿩을 만나기도 한다. 초봄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일 저녁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벚꽃, 철쭉, 보리수, 아카시아가 연이어 눈부시게 피어나는 그 언덕길을 꿈길을 거닐듯 걸었다.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거나 바람 부는 날이거나 매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의 저녁 산책은 도서관 뒤뜰에서 시작된다. 남문을 통해 도서관 건물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에 등나무 휴게실이 보인다. 매년 4월이 오면 연보라색 꽃이 피고 여름에는 푸른 잎사귀들이 지붕을 이루는 시원한 휴식의 장소이다. 그곳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돌로 지은 듬직한 건물이 나타난다. 강북에서 오자면 반포대교 위로 한강을 건너 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지는 서초대로에서 서래마을로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들어와 국립중앙도서관 뒤편에 숨어있는 그 건물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 학술원과 예술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을 떠나 이곳으로 새집을 지어 이사 올 때 그 뒤편에 학술원과 예술원도 함께 이주했다. 나는 그 건물 앞을 지나면서 “학문과 예술만이 인간을 신성(神聖)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음악의 성인 베토벤의 말을 머릿속에 되뇌어본다.

그곳을 지나면 이윽고 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나타난다. 두 갈래 길이다. 왼쪽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나무로 만든 발판을 깔아놓은 계단길이 나 있고, 오른쪽은 자연스러운 황톳빛 오솔길이다. 처음에는 계단 길로 언덕을 올라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길이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해서 어느 날 다소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내리쪼이는 고요한 언덕길에는 흙냄새와 풀 향기가 가득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까 키가 큰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무슨 나무인가 했더나 얼마 후 꽃을 피워 자기들이 벚꽃나무임을 알렸다. 그렇게 하늘로 높이 치솟은 벚꽃나무들은 처음 보았다. 그 오솔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그다음에 나온다. 불과 30㎝ 정도의 폭으로 난 좁은 숲길이다. 길은 직선이 아니라 마치 활처럼 구부러져 있다. 경사진 비탈길 양쪽에는 나무들이 서 있고 들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길을 걷다 보면 바지 자락에 스칠 정도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 여름방학 숙제로 식물채집을 하러 올라갔던 매봉산의 오솔길을 떠올린다.

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인근 몽마르뜨공원 숲길에서 인근 서래마을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뛰어놀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그 길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 이내 서리풀공원의 큰길과 만난다. 오른쪽으로는 무지막지하게 우람한 대법원과 검찰청 건물이 보인다. 길을 걸어 올라가면 몽마르뜨 공원이 나온다. 언제부터인가 서초구 방배동 일대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프랑스학교까지 그곳으로 이사 왔다. 그래서 서초구는 파리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했다. 2000년에 때마침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가 반포 지역 일대의 수돗물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 언덕에 배수지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초구는 그 위에 상판을 덮고 흙을 깔아 제법 넓은 대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곳에 공원을 조성했다. 그곳이 바로 몽마르뜨 공원(Parc Monmartre)이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강제로 이식한 나무들이 애처로워 보이고 공원 전체가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해가 가면서 점차 자리가 잡히고 안정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원의 가장자리로는 400m가량의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고 안쪽은 풀밭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프리스비를 날리거나 배드민턴을 치고 축구를 하기도 한다. 주말이면 근처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기도 한다.

한적한 오솔길을 걸어 올라오다 보면 나의 머리는 책의 세상을 떠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로 접어들지만 나의 몸은 아직도 도서관 분위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운동 기구가 마련된 공원 한구석으로 향한다. 벤치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상의를 벗어젖힌다. 그곳에는 철봉과 평행봉, 윗몸일으키기와 허리돌리기를 위한 기구 등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오래 매달려 있기도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생으로 돌아가 맨손체조를 하고 평행봉에 오른다. 두 팔로 좌우의 평행봉을 굳게 잡고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팔을 폈다 굽혔다를 반복하다 보면 가슴이 쫙 펴지는 느낌이 든다. 운동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근처의 송림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젊은 여성이 애완견을 끌고 지나간다.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다정하게 지나간다. 노부부가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풀밭에는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아놓고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공원 산책로에는 드문드문 갈색 나무판자들이 서 있는데 거기에는 보들레르, 베를렌느, 랭보, 프랑시스 잠, 빅토르 위고, 아폴리네르 등의 시가 프랑스어로 적혀 있고 그 밑에 우리말 번역도 적혀 있다. 나는 기분 나는 대로 시들을 작게 소리 내 읽어본다. 하루는 랭보의 시를, 다른 날은 보들레르의 시를, 또 다른 날은 아폴리네르의 시를 번갈아 읽다 보면 이곳이 파리의 몽마르트르 공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라보 다리 밑으로 세느강이 흐르고/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밤아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여기가 서울임을 확인한다. 맑은 정신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서초대로 위로 몽마르뜨 공원과 건너편 언덕을 이어주는 ‘누에다리’가 나온다. 강남고속터미널과 신사동 사거리 사이에 위치한 잠원동에는 옛날부터 뽕나무가 많았고 누에를 많이 키워서 비단을 짜는 잠사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초구는 이곳에 지역의 전통을 환기시키기 위해 마치 누에가 실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누에다리’를 만들었다. 그 다리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 중간쯤에 도달하면 서울의 남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북쪽으로는 남산을 지나 북한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멀리 우면산과 관악산이 펼쳐져 있고 가까이에는 사랑의교회와 예술의전당도 보인다. 다리 밑으로는 자동차의 물결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다시 언덕길이다. 경사진 언덕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야산의 정상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난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몸과 마음은 이내 홀가분하고 여유로워진다. 힘든 길은 다 끝났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동작동, 사당동, 상도동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들이 보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일몰의 풍경을 바라볼 때도 있다. 언덕 아래로는 성모병원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언덕길을 끝까지 다 내려가면 또 하나의 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 다리가 바로 ‘센트럴시티 다리’다. 프랑스 건축가 잘리꽁이 설계를 했는데 푸른 아크릴로 장식돼 있는 이 다리 위에 서면 서쪽으로는 래미안 아파트 단지가 동쪽으로는 자이 아파트 단지가 서 있고 그 사이에 강남고속터미널, 메리어트호텔,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나는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그쪽을 피해 다른 길을 들어선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미도아파트 단지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는데 나는 즐겨 그 길로 들어선다. 그 길에서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직장인들과 학생들, 저녁 찬거리를 사 들고 들어오는 주부들의 모습과 마주친다. 단지를 빠져나오면 초등학생들이 영어 과외수업을 마치고 노란색 학원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거리에는 차량의 물결이 흐른다. 나는 사람들 무리에 끼어 횡단보도를 건너 집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오늘도 또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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