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21일 코레일 수도권 서부지사 구로열차 산악회 회원들이 함백산 주목 군락지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눈길을 걷고 있다. 이들 뒤로 중함백과 두문동재까지의 능선이 눈 속에 묻혀 있다. 태백 =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신년 들어 ‘엄홍길 대장과 오르는 山’의 테마는 ‘몰입의 겨울산’이다. 엄홍길(54·밀레 기술고문) 대장은 “겨울철에는 국내 산을 오르면서 히말라야 설산에서 맛 봤던 순백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면서 강원 일대, 특히 백두대간을 이루고 있는 산들을 소개했다. 엄 대장이 ‘몰입의 겨울산’으로 첫손에 꼽은 곳은 태백산이었다. 그는 지난 17일 강북구 청소년 희망원정대 50여 명을 이끌고 태백산을 다녀왔다. 그러나 요즈음의 태백은 ‘몰입’과는 거리가 있었다. 눈꽃축제로 등산객과 여행객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청소년원정대를 이끌고 올해 처음으로 태백산을 찾았던 엄 대장은 바로 옆의 함백산(咸白山·1573m)을 ‘몰입의 겨울산’으로 소개했다. 엄 대장은 “눈이 내리자마자 함백을 오른다면 지워진 등산로를 여는‘선구자’가 될 것이고, 걸어도 걸어도 순백의 길로 이어지는 능선길에서는 ‘수도자’가 되기도 하는 게 눈길 산행입니다”고 겨울산, 특히 설산 등반의 매력을 설명했다.

함백산은 강원 동부지역에서는 최고봉이다. 우리나라 산 가운데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덕유산(1614m), 계방산(1577m)에 이어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설악산, 오대산, 대관령에서 뻗어온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흐르다 싸리재를 넘자마자 산맥을 불끈 일으킨 곳이 함백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요한 길목이라 예부터 소백산과 함께 한양을 찾는 사람들이 꼭 지나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만항(晩項)재와 화방재를 경계로 태백산과 이웃하고 있지만 태백산의 위용에 가린 탓인지 등산 애호가들에게만 알려졌을 만큼 존재감이 흐릿하다. 주봉도 태백산에 내줬다. 산맥의 중심에서 살짝 비켜선 지리적 조건과 천제단을 품은 태백산의 상징성에 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백산은 청옥산, 두타산과 태백산을 이어주는 가교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함백산은 백두대간 길에서 태백산보다 상석(上席)이고 높이도 5∼6m나 높다. 그러나 등산 애호가들은 눈꽃축제로 소란스럽고 등산로 체증 현상까지 빚는 태백산을 피해 이곳에서 겨울 산행의 진수를 만끽한다.

전국에 눈이 내린 지난 21일 다시 태백시를 찾았다. 강원 태백으로 가는 길부터 은백의 설원이 펼쳐졌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만항재를 가기 위해 산 아랫마을을 지날 때 제설이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어쩌나 가슴 졸여야 했다. 고개가 끝날 때까지 꼬불꼬불 경사진 포장도로는 하얗게 눈 덮인 키 높은 나무들에 둘러싸여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숲 속 정취가 전해졌다. 산행은 함백산 중턱에 있는 만항재부터 시작한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과 영월군 상동읍, 그리고 태백시가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나라에서 포장도로가 놓인 고개 가운데 가장 높이 위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발 1330m로 지리산 정령치(1172m)와 강원 평창과 홍천의 경계인 운두령(1089m)보다 높다. 요즘은 태백과 정선을 잇는 ‘두문동재’에 터널이 뚫려 길고 험한 만항재를 통과하는 차들이 많이 줄었다.

취재팀은 하얀 눈을 헤치며 비탈길을 오른다. 만항재가 1330m이고 정상이 1572m이니 정상까지는 242m만 오르면 되는 셈. 그러나 명색이 대간길인데 쉽게 정상을 내줄 리가 없다. 또 눈이 쌓인 비탈길은 쉽지 않다. 1시간여의 오름이었지만 체력적 부담도 만만찮다. 그러나 오르는 길에 키가 낮은 나무들에 핀 상고대와 끝없이 펼쳐진 설경은 엄 대장이 왜 태백산을 제치고 함백산을 추천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등산을 시작한 지 1시간을 조금 넘겨 정상에 다다른다. 산행거리는 약 2.5㎞. 함백산 정상에서는 백두대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난해 함백산을 찾았을 때는 바람이 강해 눈이 거의 쌓여 있지 않았지만 이날은 눈이 내리는 탓에 바람이 잦아 정상에도 눈이 쌓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새벽 일출이 장관이다.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떠오르는 일출 장면은 동해에서 맛보는 것과 또 다른 감흥이다.

함백산 정상은 기암괴석으로 마치 제단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넓게 펼쳐진 능선 위에 우뚝 솟은 제단의 정상은 돌로 반듯하게 정비해서 최정상다운 모양새를 갖췄다. 그 너머로 통신사 기지국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게 조금은 아쉽다.

눈발이 잠시 약해지자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강원의 산들이 설원을 따라 사방으로 산 너울을 이루었다. 작은 관목들 너머로 매봉산 풍력발전기가 아스라히 손짓한다. 아래 철조망 너머로 태백 오투 리조트의 슬로프들이 능선을 따라 멋진 활강라인을 만들었다.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북쪽 대간 쪽 은대봉, 싸리재, 금대봉이 숨바꼭질한다. 백두대간의 줄기를 훑는다. 거세지는 칼바람에 가슴 속 잡념을 도려낸다. 대간의 기(氣)를 채워 넣는다.

이날 정상에서는 얼마전까지 ‘파업’을 했던 코레일 구로 승무사업소 산악회원들이 정기 산행에 나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도 목격됐다.

정상에서 설원의 백두대간을 카메라에 넣은 뒤 중함백 쪽으로 산행을 계속한다. 야트막한 능선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순백의 눈길을 걷는 마음이 편안하기까지 하다. 정상의 송신탑을 둘러친 철조망을 따라 나서면 함백산의 명물 주목 군락지가 펼쳐진다. 덕유산이나 지리산 주목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단아함과 고고함은 더한 것 같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게 주목이다. 눈을 뒤집어 쓴 주목과 마치 녹용(사슴뿔)이 달린 듯한 나뭇가지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히 셔터를 눌러댄다.

중함백산에 다다랐다. 중함백도 함백산에 속한 산이다. 삼국유사 척주본에서 “금대봉 남쪽에 상함백산(지금은 은대봉), 중함백산(본적산), 하함백산(지금의 함백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함백산은 이 세 개의 산을 아우르고 있는 것. 여기서는 사방이 확 트여 백두대간의 산들을 더 잘 볼 수 있다. 중함백과 1325봉을 거쳐 안부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적조암, 정암사로 향하는 하산길이다. 아기자기한 쉼터가 손짓하는 숲길을 지나면 자작나무샘터다. 내리막길에서도 녹용을 만들어 낸 투명한 상고대의 행렬은 계속된다. 활엽수림이 우거진 하산길을 한참 걷노라니 길 옆 잡목엔 상고대의 흔적이 어느새 지워지고 없다. 414번 지방도로, 여기서 정암사까지는 도보로 20분 거리다. 정암사는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 대국통을 지낸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모셔와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찰 뒤쪽 높은 산비탈에 자리한 수마노탑은 7m의 7층 석탑이다. 마노(瑪瑙)는 석영질 보석의 일종으로 재앙을 예방해주는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자장율사가 귀국시에 가져온 마노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용왕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마노석을 옮겼다 하여 수(水)자를 붙여 수마노탑이라 부르게 됐다. 현재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신 덕에 정기가 서려 기도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전국에서 매년 새해나 입시철에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태백 = 박광재 기자 kj5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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