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엄홍길 대장이 16일 소요산 자재암에서 하백운대 쪽 능선을 오르고 있다. 눈 덮인 소요산 의상대를 배경으로 한 소나무가 더욱 푸르게 보인다. 동두천 =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엄홍길(53·밀레 기술고문) 대장이 새해 들어 세 번째 수도권 산행지로 택한 곳은 경기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에 걸쳐 있는 소요산(逍遙山)이었다. 추위와 교통 불편 때문에 가급적 장거리 산행을 자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 대장은 “높이가 587m에 불과하다고 절대로 얕볼 수 없는 산입니다. 원점회귀산행으로 모든 봉우리를 거쳐 한 바퀴 돌아오려면 상당한 인내심과 체력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한 산행이죠”라고 소요산을 소개했다.

엄 대장과 함께 소요산 원점회귀산행을 감행(?)한 날은 16일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갑작스럽게 문상을 가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산행은 오후에 단축 산행으로 변경됐다. 엄 대장과 함께 ‘청소년희망원정대’를 창설, 운영하고 있는 서울 강북구청의 박겸수 구청장이 부친상을 당해 조금 멀리 문상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 소요산행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소요산역 주변 식당 주인은 “2006년 말 전철 1호선과 연결된 소요산역이 개통되면서 주말에는 줄을 서서 올라갈 정도죠. 평일에도 인근의 노인들로 자재암(自在庵) 근처가 붐빕니다. 어르신들이 소요산 자락에서 말 그대로 ‘소요(逍遙)’하는 거죠”라고 최근의 소요산 일대 분위기를 전했다. 그래서 이날 엄 대장이 들려준 ‘히말라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였다.

엄 대장은 “어려서는 물론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속을 꽤나 썩였죠”라며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깐깐한 성격에 군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에는 타협하는 법이 없는 분이셨죠. 그래서 제게는 장남의 역할을 강조하며 늘 엄하게 대하셨죠. 그렇지만 나는 늘 그분의 기대와 달리 번번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이따금씩 아버지는 역정을 내고 타이르기도 하셨지만 별 소용이 없자 더욱 심하게 가슴앓이를 하셨죠.” 그는 처음 히말라야 원정이 결정됐을 때도 출국 전날에야 가족에게 원정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산에 가는데 등반은 하지 않고 밑에서 선배들을 도와주기만 하면 되니 걱정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렸죠.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다행이다. 그래도 외국이니 몸조심하라’고 당부하실 뿐이었습니다. 말린다고 가지 않을 놈이 아니라는 걸 아셨기 때문이죠.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바로 이 땅의 ‘아비들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해외원정을 중단해야 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폐암이 발견된 것.

“새벽에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계셨죠. 그 사이 칸첸중가봉 생중계 원정팀의 선발대는 물론, 내가 합류키로 한 본대마저 히말라야로 떠났어요. 그것은 아버지 생전에 한 번도 기쁨을 안겨 드리지 못한 불효자가 마지막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죠. 나는 병상 곁에서 꺼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내가 아버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없이 괴로웠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장례가 진행되고 삼우제가 끝날 때까지 나는 슬픔 속에서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죠. 아버지는 자식들로서는 영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는 사실을….”

엄 대장은 삼우제를 마치고 곧바로 원정대에 합류했다. 아버지 당부를 따르자면 히말라야행을 포기했어야 했지만 그는 “아버님의 본뜻은 멈춤 없는 도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죄송하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소요산은 겉만 봐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산이다. 어디를 뜯어봐도 ‘경기소금강’이라는 풍광은커녕 오히려 밋밋하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모든 게 달라진다. ‘대화엄’의 세계로 인도하듯 겨우내 흰 눈을 머리에 인 ‘의상봉’이 굽어보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 속리교까지 이어지는 산 입구에서부터 입이 절로 벌어진다. 처음에는 풍광 때문에, 그 다음은 가파른 계단을 끝없이 오르느라. 산행은 속리교 지나 등산안내도가 설치된 갈림길에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오른쪽은 공주봉으로, 왼쪽은 자재암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 길이다. 공주봉으로 올라서 의상봉과 나한봉과 나한대를 거치는 코스가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든다. 그러나 구절터에서 공주봉까지 급경사 길은 자재암에서 하백운대 오르는 길보다 길기 때문에 일장일단이 있다.

소요산은 원효대사(617∼686년)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소요산 입구에 있는 자재암은 645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했다.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는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그곳에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소요산의 주산(主山)은 의상대(587m)다. 왜 최고봉에 ‘의상대사’(625∼702년)의 이름을 붙였을까. 알려진 대로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 유학길을 동행하던 중 원효는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돌아와 수행을 했고, 의상은 유학길을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두 사람 모두 깨달음을 얻었지만, 원효는 자재무애한 광승(狂僧)으로 떠돌았던 ‘국내파’고, 원효보다 어린 의상은 ‘유학파’로 국사(國師)로서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제자도 많이 남겼을 것이다. 아마 그 같은 행로의 차이가 소요산 봉우리 이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박광재 기자 kj5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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