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알 기념비가 있는 반짝이는 도시 #3’, 243.8×203.2㎝, 2023. 아크릴 물감과 래커 스프레이를 사용했다.

■ 래리 피트먼展, 전남도립미술관서 개막

복잡하게 얽힌 기호·강렬한 색채
대도시만이 가진 ‘활기’ 보여줘

조수 안 두고 사전스케치도 생략
캔버스에 직접 선 그리고 색입혀

14년간 제작한 회화 40점 선별
회복·재생… 40년 예술세계 조망


달걀, 새, 깃털, 밧줄, 종, 눈, 얼굴, 스테인드글라스…. 다양한 기호와 상징을 중첩하는, 독특한 시각 언어로 유명한 미국 작가 래리 피트먼(73). 그가 캔버스 위에 쌓아 올린 도상들은 언뜻 무질서해 보이지만,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직조돼 있다. 그래서일까, 한참을 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낙관적 미래’가 들어차는 것도 같다. ‘어수선한’ 그림 속에서도 단단한 기운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평생 현대인의 회복과 재생을 탐구해온 피트먼의 철학과 기술이 응축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피트먼은 휘트니, 베니스비엔날레, 카셀도쿠멘타 등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으며 우리 세대 가장 중요한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작가의 국내 첫 미술관 전시가 열려 눈길을 끈다. 18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막하는 ‘래리 피트먼:거울&은유’. 국제적 인지도에 비해 국내선 덜 알려졌던 피트먼의 예술 세계를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지난 14년간 제작한 회화 40여 점을 선별했으며, 시대를 꿰뚫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뿐만 아니라 인류를 향한 따스함까지 함께 감지할 수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래리 피트먼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우선 피트먼의 수많은 연작 중 주요한 일곱 개에서 선정한 작품들이 최초로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것이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타 큐레이터 로셸 스타이너가 기획했으며, 일곱 개의 연작은 ‘사고의 형태’(2012) ‘카프리초스’(2015) ‘야상곡’(2015) ‘아이리스 샷, 시작과 끝’(2020) ‘디오라마와 바니타스’(2021) ‘알 기념물이 있는 도시’ (2022)‘알 기념물이 있는 반짝이는 도시’(2023) 이다.

비교적 근작으로 구성된 전시는 에이즈 위기, 인종 갈등, 성소수자 시민권 운동 등 사회정치적 투쟁의 영향을 받은 초기작과 달리 심리적 주제를 포함한 내면적 공간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그는 작품에 일관되게 ‘알(eggs)’을 등장시키는데, 이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면 피트먼의 예술 세계가 보다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알’에 대해선 작가가 일찌감치 그 의도를 자주 밝혀왔는데, 이는 ‘잠재성’‘가능성’을 포용하는 관념으로, 상징이라기보다는 은유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지점은 작가가 팬데믹 기간에 열심히 그려낸 작품들이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그림들로, 대도시를 오마주한 작품들이 대다수다. 작가 특유의 밀도 높고 복잡하게 얽힌 이미지, 강렬한 색감을 특징으로 하는 대형 회화로 제작됐다.

작품들은 작가의 주된 탐구 주제인 삶과 죽음, 사랑과 성, 소비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념들을 코로나19가 안겨준 ‘고립’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본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이후 따라올 도시의 ‘재탄생’까지 아우른다. 온 세상이 가장 암울했고, 가장 비관적이 되었던 그때에, 작가는 그동안 추구해 온 ‘회복과 재생’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던 셈이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팬데믹을 도시 문명이 만든 재앙으로 규정하며 자연으로의 회귀 등을 작품에 담아내곤 했으나, 피트먼은 반대로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의 아름다움과 복합성, 무질서한 잠재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다소 논쟁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으나, 도시만이 지닌 특별한 활기에 주목한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18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막한 ‘래리 피트먼 : 거울 & 은유’의 전시 전경. 현대 사회의 재생과 회복의 메시지를 담은 일곱 개의 연작을 선보인다.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국 작가 피트먼은 다양한 기호와 상징을 통해 대도시의 활기, 낙관적 미래를 화폭에 담아왔다. 그의 회화를 한국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건 이번이 최초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그의 세대 많은 예술가들이 조수를 두고 작업하거나 디지털 도구 등 여러 제작 수단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피트먼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홀로 작업한다. 그의 회화 작품은 복잡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으나, 그림은 단순하게 그리는 것이다. 그는 사전 스케치 없이 캔버스에 직접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힌다. 또, 작품마다 제목을 먼저 정하고, 생각을 글로 정리한 후, 시각적 구조를 설계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작품이 스스로 만드는 대화를 발견하고, 작품에 내재한 집단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방식을 연구하는 것일 터. 이러한 작가의 철학과 작업 방식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읽어내면, 관람이 몇 배는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한편, 이번 전시는 미국계 갤러리 리먼 머핀 서울과의 협업으로 성사됐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유수의 갤러리들과 함께 국제적으로 인지도 높은 작가를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작품 대여나 구성, 기획 등을 함께 논의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지역에서 만나기 힘든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서다. 앞서 페레스프로젝트를 통해 리처드 케네디를, 아트선재를 통해 리너스 반 데 벨데를 소개한 바 있다. 전시는 6월 15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