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해 봄 숙맥 동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정재서, 장경렬(기립), 이상옥, 이익섭, 주종연, 안삼환(기립), 이상일, 정진홍 교수. 숙맥 제공

■ 서울대 출신 교수 14명, 동인지 ‘숙맥’ 17집 출간

“예전엔 현실비판 글 썼는데
요즘은 무력하게 바라만 봐

선동적 말로 대중현혹 시대
삶의 가치 깨치게 도울 것”

“정치 권력은 국민 일상을 난국에 빠트리고, 의학 권력은 국민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기득권 이익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는데 인문학은 이에 개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인문학자들이 현실 비판적인 글을 기고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전혀 힘이 없지요.”

정재서(73)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는 13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인문학이 너무 무력한 시대”라며 “당대의 석학들이 책을 내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서울대 출신 교수들의 동인 ‘숙맥(菽麥)’이 이달 출간한 문집 ‘해묵은 소망 하나’(푸른사상 발행)에 대해서다.

1950년대 서울대 문리대를 다녔던 김재은, 이상일, 이상옥, 김상태, 정진홍, 주종연, 김명렬 등 9명의 교수가 대학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학문적 교류를 목적으로 2003년 모임을 만들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 ‘숙맥’을 자처하며 그해 첫 동인지를 냈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창립 멤버인 김용직, 김창진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김학주, 김경동, 이익섭, 곽광수, 안삼환, 정재서, 장경렬 교수 등 새로운 회원을 맞아들여 현재 14명으로 이뤄져 있다.

올해 열일곱 번째 문집에서 정 교수는 ‘봉원사(奉元寺)의 조(趙) 낭자(娘子) 비석 앞에서’ 등 3편의 글과 더불어 서문을 썼다. 그는 우리나라의 인문학적 빈곤에서 오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고, 출산율은 또 세계 최하위잖아요. 그런데 삶의 정신과 관련된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치유할 인문학적 방책을 내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어요. 오히려 인문학의 무용론을 공언하는 경우가 이어졌지요.”

그는 이 실용 지상의 시대에 무용하다고 하는 인문학을 평생 품고 사는 숙맥회 문사들이야말로 정말 ‘숙맥’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의미심장한 이름의 모임을 20년 넘게 유지하며 구순을 바라보는 노교수들이 여전히 글을 쓰고 매년 출간을 이어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매번 책의 타이틀은 회원들의 글 제목 중에서 정하는데 이번에는 이상옥(89)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가 쓴 ‘해묵은 소망 하나’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경동(89)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나 혼자 산다? 파편화 사회의 단면’, 정진홍(88)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의 ‘ Wait for none!’(아무도 기다리지 말아라) 등을 비롯해 11명 원로 교수들의 글 24편이 실렸다. 수필을 중심으로 논평, 서평, 예술평론, 여행기 등 다양한 글모음이다.

“일세(一世)를 풍미했던 분들이고 최고의 문필가들이시잖아요. 1세기 가까이 사신 분들이 쓴 글들인데 보물이라 할 수 있지요. 제가 선배님들하고 10∼15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글의 깊이라든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라든지 참 대단하시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지금은 권력과 자본을 추종하는 유튜버들이 선동적인 언사와 이미지로 대중을 현혹하는 시대이니 인간과 세상에 대해 이렇게 오랜 성찰을 통해 녹여나온 글을 만나기 쉽지 않지요. 인문학적 가치라는 것이 결국 삶의 가치인데 이렇게 쉽고 재밌는 에세이를 통해서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중년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문학이 많이 위축된 상황이지만, 숙맥 회원들은 이렇게 동인지 안에서 일상의 소회를 풀어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선생님들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인문학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어요. 이분들의 심오한 사색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글들이 잘 전해지지 못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지요. 널리 읽히고 많은 사람에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