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DGIST 석좌교수

17~30세 기억 ‘회고절정’ 현상
화염병·최루탄 소환한 노년층
트라우마 따라 대응도 차별화

모래알 같지만 선 넘으면 폭발
진영 구분 아니라 사안별 대응
다양성과 다원성에 미래 희망

처음 뉴스를 접하고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던 그 폭력의 시대, 언젠가 빛바랜 사진첩 속에 봉인시켰던 젊은 날의 초상이 이제 머리 희끗한 노년에 들어 다시 현실로 등장할 줄은, 아무리 복고의 시대라지만 ‘계엄’의 기억까지 소환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 겪었던 경험은 뉴런의 연결을 통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은 나이가 들어도 자주 떠오르기 마련이다. 특히나 17세에서 30세 사이의 초기 성인기 추억은 가장 화려했던 좋은 기억으로 간직돼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바로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 심리 때문이다. 반면,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은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장기 기억의 깊은 곳에 봉인해 두기 쉽다. 그러나 이 잠재된 기억을 자극하는 상황을 접하면 스스로 놀랄 만큼 선명하게 고통이 느껴진다. 바로 ‘트라우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최루탄 냄새에 목젖이 타들어 가고 화염병이 터져 콘크리트가 불바다가 되던 그 시기를 같이 겪었던 세대들, 이제는 장년을 넘어 노년기에 접어든 그 세대들에게 이번 계엄령은 그 자체의 절대적 무게감 못지않게 장기 기억을 건드리게 했다. 무의식 속에 애써 봉인해 두었던 아픈 기억이 해제되면서 더 고통스러운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계엄은 어떤 색깔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렇게 화인과 같이 집단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묻혔던 트라우마가 건드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들의 행동은 사뭇 달랐다. 절대로 무관심하거나 별것 아니라는 식이 아니라, 어쩌면 나름의 더욱 적극적인 대응을 보였다. 소환할 고통스러운 장기 기억이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더욱 자유롭게 그리고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현안을 볼 수 있었던 것인지, 촛불 시위라는 말이 무색하게 형형색색의 탄핵봉들이 전혀 ‘일사불란’하지 않게 겨울 찬바람을 가르고 자유롭게 유영했다. 멀리서 본다면 그저 축제의 한마당이나 가수들의 야외 콘서트를 방불케 할 만큼 이들의 공간은 ‘치열한 강권’보다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에 가까웠다.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을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만큼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주의만큼이나 ‘서로 간 다름’, 즉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하며 독립적인 가치 판단에 기초해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때로는 무관심해 보이기도 하고, 또 통합되지 않아 모래알 같지만 어떤 선을 넘으면 훨씬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특징이 있다.

계엄령 해제 이후 여의도를 메운 주력 세대가 이들 젊은 세대인 반면, 조국 사태 때 가장 분노했던 세대 역시 바로 이 젊은 세대들이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이전의 세대들과 비교할 때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내 편’이라는 동질성도, ‘적’이라는 반감도 없다. 그저 당면하는 과제에 따라 특히 공정과 정의라는 선을 넘게 될 경우, 명확한 자신들의 의견을 가차 없이 표출하는 것이다.

계엄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맞서 이를 코믹하게 패러디하면서, 광장의 젊은이들 각자가 유머러스한 개인당 이름을 만들어 즐겁게 대항하는 모습. 1980년대까지 마치 젊음의 상징처럼 대학가에 만연했던 시위가 치열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면, 40여 년이 지난 지금 젊은이들의 모습은 유연하고 축제의 장을 이루는 것이 섬뜩할 만큼 강렬하다. 겨울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매일 계속되는 이들의 즐거운 시위 현장, 그들의 심장 깊은 곳에서 40여 년 전보다 어쩌면 더 처절한 외침, 강력한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2030이라고, 자신의 진영 논리에 휩싸여 아전인수 격으로 이들을 판단하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모르는 ‘꼰대’들의 어리석음일 수 있다. 이번 계엄령과 이어진 탄핵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 앞에서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만의 대한민국을 축조해 갈 역량과 건강함이 살아 있다는 것, 젊은 그대, 그대들이 내일의 희망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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