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00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묵. 민음사 제공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화가가 살고 있습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가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그림과 함께 독자들을 찾아왔다(문화일보 12월 6일자 19면 게재). 문학 분야에서 정점에 선 이들에게 주어지는 노벨문학상. 세계 최고의 성취를 이룬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을까? 더 이상 이루고자 하는 바가 남아 있을까?

14년째 이어진 그림일기가 묶인 ‘먼 산의 기억’(민음사)에 그 모든 답이 담겨 있다. 작가는 매일 작은 수첩 두 페이지에 자신의 일상을 담았다. 사사로운 생각부터 작품을 구상하고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되는 예술 여정까지 파묵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시간이 글과 그림이 됐다.

그림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왜 일기를 쓰게 됐는지, 또한 풀리지 않는 자아실현의 갈증과 남은 꿈에 대한 결핍까지 궁금증이 더욱 샘솟는다. 파묵은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한국 기자들이 쏟아낸 질문에 정성 어린 답변을 보내줬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의견,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축하와 현재 진해 중인 소설 작업 등에 대해 답했다.

파묵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 중 주요 문항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매일 몰스킨 공책에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는데 왜 큰 공간에 그리지 않았나요?

몰스킨 공책이 제 호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지요. 더 큰 공책이라면 휴대하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 공책은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제작된 것입니다. 때로 기차를 타고 갈 때 노트를 하고, 때로는 어딘가에서 식사를 할 때도 노트를 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아내와 외출을 하려고 할 때 그녀를 기다리면서 노트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틈새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어떻게 시간을 내냐고 묻는데, 이렇게 쉽게 시간을 낼 수 있지요. 누구에게나 하루 중에 이러한 틈새 시간이 있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지 크게보기 오르한 파묵이 직접 노트에 쓰고 그린 그림일기의 한 장면. 오르한 파묵 제공

-일기를 쓰는데 보통 얼마나 시간이 걸리며 그리는 시간들에 주로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일기를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서로 다른 감정입니다. 일기를 쓸 때 저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문장을 만들고, 일반화하고 흥미롭게 만들고자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지요. 그림을 그릴 때는 정확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색깔들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즉, 글을 쓸 때와 그림을 그릴 때의 제 상태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이 공책에 그린 그림들은 글을 설명하는 것도, 글을 장식하거나 글에 대한 삽화를 넣는 것도 아닙니다. 일기에 쓴 글 역시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꾸 과거의 일기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색과 그림을 덧칠하고 새로운 글을 추가해 넣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건 물론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항상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은 항상 수정, 즉 리터치 작업을 한답니다. 수정하면 조금 더 마음에 들고, 조금 더 수정하면 그 페이지를, 그 수첩을 한층 좋아하게 되지요.

그 수첩은 곧 제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글을 쓰는 책상이자, 그림을 그리는 책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그 수첩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새롭게 글을 덧붙이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그것들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날 떠오른 것이 아닐 수 있지요. 제 수첩은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작가님의 내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출판을 하는데 주저함은 없었나요? 또 방대한 내용을 어떤 기준으로 추렸는지 궁금합니다.

네, 하지만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 두려움이나 대통령이 저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노트들은 아주 빠르게 예전의 것이 되고 말지요. 화를 내고, 정치적 분석을 한 내용들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의 75%가 대통령에게 화를 내고 있지요.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 상황을 노트에 적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모두 잊고 맙니다. 그때는 아무도 제가 쓴 것들을 읽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정치적 분노 같은 것들도 수첩에 적지만, 이러한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쓰는, 즉 독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것이 된답니다.

그리고 참, 한국인들 75%의 바람에 존경을 표합니다,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길 바랍니다.

-정지된 이미지가 아닌 움직이는 이미지를 근간으로 하는 영화는 어떤 예술이라고 생각하나요? 덧붙여 최근에 가장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입니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에서 세 번 정도 봤습니다. 최근 제가 3∼5년 사이에 봤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아니 이게 뭐야’ 싶고 화가 잔뜩 나서 ‘안 볼거야’ 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 다시 볼 겁니다.

‘백년의 고독’을 마치 실화처럼 제작했더군요. 그런데 제가 그 책을 읽었을 때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영화가 기절할 정도로 너무 좋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볼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소설 ‘순수 박물관’이 지금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도 연관해 말할 수 있겠군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법이나 원칙, 특징은 무엇인가요?

이건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천천히 거북이처럼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2∼3시간 앉아서 4페이지를 쓴 후 하루의 남은 시간에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계속 글만 씁니다. 제가 질투하는 유형의 작가들이 있는데 그건 하루에 서너 시간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쓴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 자신과 싸움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집요함, 상상력, 자아비판, 장황하게 쓰지 않고 줄이기, 그리고 제 아내, 친구들에게 그때까지 쓴 것들을 보여 주고 그들의 생각을 듣는 것, 다시 쓰는 것. 이러한 것들의 작가로서의 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요하고, 단호하고, 다시 쓰고, 수정하고, 다시 읽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노벨문학상은 한 작가의 정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이 어떤 의미인가요? 이후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고 어떤 면에서 어려움이 되나요?

저에게는 이 말을 적용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노벨문학상을 54세에 받았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상한 셈이지요. 노벨문학상을 받던 해에 저는 소설 ‘순수 박물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절반 정도 썼을 때였답니다. 하지만 저는 상을 받은 후에도 간극을 두지 않고 계속 썼습니다.

‘순수 박물관’은 지금 제 작품 가운데 튀르키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이지요. T.S. 엘리엇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좋은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 세 편을 꼽는다면, 제 생각에 그건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내 마음의 낯섦’입니다. 이스탄불 삶의 풍부함을 이 책들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순수 박물관’은 네 번째쯤 되겠지요. 노벨문학상이 저에게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책임감일 뿐입니다.

-“나는 쉬지 않고 일한다. 이상하다. 마치 뭔가 증명해야 할 게 있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증명하려 하나요?
내가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는지 정말 나도 모르겠습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면 글을 못 쓸 것 같습니다(웃음).

이미지 크게보기 오르한 파묵이 직접 노트에 쓰고 그린 그림 일기의 한 장면. 오르한 파묵 제공

-21세기에도 여전히 정부의 검열과 탄압은 자행되고 있습니다. 터키의 권위적인 정치 체제에 대해 그간 많은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는데 정치적 소신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나요?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약간 용감할 수도 있겠지만 과장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많은 작가들을 감옥에 넣었는데, 아마도 위에서 말한 노벨문학상이 나를 보호해 주는 것도 같습니다.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며 문학(출판)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정치가가 아닙니다. 정치 소설을 쓸 수도 있겠지요, 현재 우리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신문에 기고를 할 수 있고, 예컨대 광부들에게, 어부들에게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등.
나중에 그 소재들로 책을 쓸 수는 있겠지만 저는 지금까지 정치 소설을 단 한 편 썼습니다. 소설 ‘눈’이지요. ‘페스트의 밤’은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닌데 정치 소설이 됐습니다. 일례로 ‘내 이름은 빨강’을 처음 쓸 때는 정치 소설로 시작했답니다. 이슬람 회화를 금지하고, 세밀화가들이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는 등….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림을 묘사하는 것, 세밀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세밀화를 그리는 희열, 세밀화의 매력에 빠지는 등등의 부분이 정치적인 면보다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빨강’은 정치 소설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예술사 소설 같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비(非) 서구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 서구의 시선이 중심인 세계 문학계에서 튀르키예 작가로서 문학을 하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보다 먼저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받을 수도 있었겠지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 만족합니다.

-한국 작가 최초로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가님이 튀르키예어 작가 최초로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셨을 때 튀르키예 독자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감동을 한국 독자들이 느끼고 있어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한강 작가님께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터키어로 번역된 그녀의 작품들이 나왔는데 구입해 놓았습니다. 곧 읽을 것입니다.

-현재 천착하고 고민하며 쓰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내용이고, 언제쯤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요즘에는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꽤 많이 썼는데 잠시 쓰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다시 그 소설로 돌아가 지금까지 했던 새로운 생각들을 쓰려고 합니다. 작가들은, 아니 저는 계속 쓰다가 6개월 정도 멈추고 다시 새로운 생각이 나서 내용을 바꾸고 다시 쓴답니다. 한국 독자들과도 만날 ‘첫사랑’을 끝맺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제 출간되는지에 대해서 제가 추측했던 것이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습니다. 6개월 후가 될 수도 1년 후가 될 수도.

-한국 독자들도 책을 보고 그림일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추천해 주실 만한 방법 혹은 그림일기의 최대 장점이 궁금합니다.
일기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되고, 자신과 말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계속 쓰다 보면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가끔 어떤 생각이 떠올라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데 그걸 공유할 사람이 없을 수도 있지요. 혹은 이야기를 해도 당신을 이해해 주지 못할 수 있지요. 일기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게 외로움의 연장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면도 있지요. 혹은 내가 기발한 것을 생각했는데,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일기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야 쓸 수 있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기를 쓰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나날은 틈새 시간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림일기를 쓰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라고 물으셨는데,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장점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어떤 시적인 것입니다.

장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