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매일 아침 테라스에서 마주하는 풍경을 그린 그림. 파묵은 ‘먼 산의 기억’에서 이 그림을 그린 날을 떠올리며 “사람은 모든 시간을 모든 그림으로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생은 일련의 그림으로 구성”되고, 결국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이 된다. 오르한 파묵 제공

■ 먼 산의 기억

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설가
노벨상 받은뒤 쓴 그림일기
내면의 세계 투영한 풍경화
개인적 일상·고민까지 기록
‘페스트의 밤’ 등 작품 배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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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으니 솔직하게 쓰고, 마음껏 그릴 수 있다. 튀르키예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이, 난데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걸 일기 삼기로 작정했을 때엔 아마 이런 생각이지 않았을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수십 년 전 ‘나’를 소환시키고, 동시에 그런 ‘나’를 꽁꽁 숨겨놓을 수 있는 곳으로서 말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얼마 후 충동적으로 연필과 붓을 잔뜩 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아도 자아실현의 갈증과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결핍은 해소할 수 없었던 것일까. 파묵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그리고 소설가가 되는 바람에 수십 년 꾹꾹 눌러 놓았던 자기 안의 화가를 깨운다. 그리고 매일 작은 수첩 두 페이지를 쓰고 그렸다. 때로 그것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이기도, 때로는 작품을 잉태하는 위대한 예술가의 일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것. 파묵은 이 내밀한 세계의 문을 단단히 잠그는 것에는 실패했다. 14년째 이어진 그의 그림일기가 책으로 나와 세상에 공개됐으니.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파묵의 그림일기를 한 권에 집약한, ‘먼 산의 기억’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연인이 찍어준 사진을 토대로 파묵이 그린 자신의 모습. 이마 위에는 그가 비행기에서 가져온 수면용 안대가 얹어져 있다. 그는 종일 소설 쓰고 나서 저녁 식사 후 종종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잠이 든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 제공

그는 뭘 쓰고 그렸을까. 작가 스스로 “마치 세상을 이 안에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내가 살 수 없는 삶을 이 페이지에서 살려고 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듯, 작은 수첩에 그가 숨긴 세상, 즉 또 다른 파묵이 사는 세상은 크고 다채롭다. 왜 아닐까. 십수 년 매일 꾸준히, 몰스킨 한 바닥만큼 ‘꿈’을 쌓고, 못 가본 ‘길’을 걷는 자의 우주인데….

일기는 대강 끄적인 듯 보이다가도 언뜻 앙리 마티스가, 또 반 고흐가 떠오를 만큼 수려한 그림들로 채워졌다. 제목의 ‘먼 산’에서 감지할 수 있듯, 주로 풍경을 그렸는데, 이에 대해 그는 “아름다운 풍경은 나에게 세상과 우주를 존중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사람은 “광활한 풍경처럼 개방적이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풍경은 자신을 겸허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영적 세계다. 특히 그는 중국의 산수화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그림이 화사하지만, 드물게 수묵화처럼 검정과 회색, 푸른빛이 감도는 산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었다. 예컨대 그는 어느 해 남미를 여행하던 중 여자친구와 헤어져 힘든 시기를 보내지만, 이내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그 덕에 소설 ‘내 마음의 낯섦’도 완성한다. 그 시기, 그의 풍경은 온통 산수화다. 대작가의 집필과 연애의 상관관계라니, 일기를 엿보는 묘미다.

이미지 크게보기 오르한 파묵이 하루 열두 시간씩 글을 쓰며 ‘페스트의 밤’을 완성한 방. 의자 등받이에 파묵의 재킷이 걸려있다. 오르한 파묵 제공

그는 또 “풍경은 또한 삶과 상상으로의 초대”라고 했다. 즉, 영감의 원천이다. 파묵은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근작 ‘페스트의 밤’의 배경을 결정한다. 그는 우르비노 성을 보고 그리며, ‘페스트 성’은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토바 두칼레 궁전에서는 “마치 실제 장소가 아니라 ‘페스트의 밤’을 위해 상상했던 어딘가인 듯했다”고 감탄했다. 또, 인도 암베르 요새 안을 걸으며 ‘페스트의 밤’ 속 두 등장인물을 떠올린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여전히 ‘화가가 되지 못한’ 천생 소설가, 천재 소설가 파묵을 만나게 된다.

이미지 크게보기 오르한 파묵이 그린 이탈리아 만토바 두칼레 궁전. 그는 이때의 풍경에 대해 “실제 장소가 아니라 ‘페스트의 방’을 위해 상상했던 어딘가인 듯했다”고 일기에 썼다. 오르한 파묵 제공

‘먼 산’은 여러 의미를 품고 있다. 실제로 파묵의 튀르키예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섬이기도 하고, 저 멀리 있는 높은 산처럼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고,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 장소이며, 거기엔 뭐가 있을까 상상하는 장소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설과 그림은 가장 뚜렷한 ‘먼 산’인 셈이다. 파묵은 “저 멀리 또 다른 삶과 세계가 있다는 상상, 멀고 거친 풍경이 암시하는 다른 삶에 대한 생각은 나의 모든 삶을 정의하도록 항상 나를 사로잡았다”며 예술과 문학에 관한 철학을 드러낸다. 또, “매일매일이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우리는 순간을 살고,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꿈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며 삶을 관조하기도 한다. 마음의 양식을 배불리 먹어 포만감이 오는데, 파묵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안에도 그런 ‘먼 산’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다. “배가 출항한다. 배를 보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꿈을 꾸자.” 한 해가 저문다. 내년도 수첩, 두 권 사면 어떨까. 파묵처럼 ‘먼 산’을 품기 위해. 400쪽, 2만8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