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책은 백신 접종 음모론을 키운 건 거대 제약회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라고 지적한다. 사진은 코로나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시위자. 로이터 연합뉴스

■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마이클 셔머 지음│이병철 옮김│바다출판사

美의회 폭동 촉발한 투표조작론
“정권 이득” 9·11테러 자작극설
제약회사 불신이 낳은 백신거부
구체적 사례 제시… 음모론 해부

똑똑한 이들 틀린 것 믿는 이유
“주류 맞설 대안적 진실” 여긴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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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6일 미국의 흑역사가 한 페이지 기록됐다. 투표 조작이란 음모론에 빠져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난동을 부린 것이다. 심지어 그중엔 하원의원도 있었고, 전직 경찰서장도 있었다.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국회에 대항해 무기를 들었을까. 똑똑한 이들이 왜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우면서 뻔히 틀린 것을 믿을까.

‘음모론이란 무엇인가’에서 미국 과학 저술가 마이클 셔머는 인간 마음을 사로잡는 음모 효과의 위력에 충격을 받아 음모론의 본질을 해명하는 작업에 나선다. 저자는 먼저 음모와 음모론을 구별한다. 음모는 “불법 이득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둘 이상이 몰래 어떤 일을 꾸미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기만은 인간 공동체 전체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역사 전반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행위이다. 음모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 사실 여부를 밝힐 수 있다.

음모론은 음모가 실제 사실인지와 상관없이 쌓아 올린, 음모에 대한 구조화한 믿음을 뜻한다. 음모론은 경험적 진실보다 깊은 차원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의 산물이고, 주류가 지배하는 현실에 맞서 힘들게 알아낸 대안적 진실이다. 예를 들면 우매한 시민들은 모르지만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숨은 세력이 있다든지, 수백 년 전부터 인류 지배의 야욕을 품고 활동하는 템플기사단, 일루미나티 같은 그림자 정부가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에 휘말렸던 9·11 테러. 로이터 연합뉴스

남들은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안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기에 이들은 음모론자가 되는 게 지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성별, 나이, 인종, 소득, 정치 성향, 교육 수준, 직업적 지위를 가리지 않고 똑똑한 이들이 사이비 음모론에 빠져드는 이유이다. 미국인 넷 중 하나는 “선출되지 않은 비밀 엘리트 그룹인 딥스테이트가 미국 정부의 행위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셔머에 따르면 음모론은 대리 음모주의, 부족 음모주의, 건설적 음모주의 등으로 나뉜다. 대리 음모주의란 대리 진실 즉 어떤 사건 이면에 정부, 기업, 기관의 음모가 존재한다고 믿는 일이다. 가령 백신 접종 음모론은 거대 제약회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낳았다. 임상 결과를 조작해 큰 이익을 취해온 제약회사들 행태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 대리 음모론자들은 실체적 진실보다 자신이 믿는 신화적 진실을 우선한다. 이들에게 9·11 테러는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다.

부족 음모주의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성심을 드러내려고 음모론을 믿는 일이다. 1920년대 독일인들은 ‘뒤통수치기’ 음모론을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패하지 않았는데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뿐이란 것이다. 이 음모론에 빠진 나치는 소속 집단에 충성하고 대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신호를 보내려고 자기 믿음을 강하게 밀어붙인 끝에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건설적 음모주의는 음모를 믿는 쪽이 안 믿는 쪽보다 생존에 더 유리하기에 음모론을 좇는다. 진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풀이 스치는 소리를 포식자 움직임으로 믿는 쪽(음모)이 바람으로 생각하는 쪽보다 살아남기 쉽다. 바람이라 생각하다 포식자가 나오면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등 현실에서 음모는 숱하게 일어나므로 순진하게 행동하지 말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움직이는 게 더 낫다. 우리가 음모론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그림자 정부’ 음모론 속 존재하는 일루미나티를 상징하는 ‘섭리의 눈’.

사람들이 순진해서 음모론에 빠지는 게 아니다. 음모론자들도 다른 합리적 시민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위험한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음모론자들이 말하는 진실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전쟁이나 공황 같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문제로 환원해 답하거나, ‘숨은 적’들을 불가사의하게 유능하며 비정상적으로 사악한 존재로 추어올린다. 가령 외국인 노동자만 쫓아내면 실업과 불황의 고통은 한 번에 해결된다는 식이다.

오늘날 어떤 주장이 음모론인지를 판별하는 힘, 즉 문해력은 매우 중요하다. 횡행하는 가짜 뉴스, 넘치는 대안 진실에 맞서는 사고 도구를 셔머는 우리에게 제시한다. 주장의 출처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 주장이 다른 출처에 의해 검증되었는가 등 10가지 질문으로 음모론의 허구성을 파헤치는 ‘헛소리 탐지 키트’와 음모 달성에 초인적 능력이 필요한 행위자성, 세계 지배 같은 황당한 목적을 내세우는 거창함 등 10가지 요소로 음모 여부를 가려내는 ‘음모 탐지 키트’이다.

음모론을 무찔러서 사회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대화하는 문화의 복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셔머는 근대 과학혁명이 이룩한 ‘지식의 헌법’에 맞추어 공론장을 다시 열자고 이야기한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증 가능성에 열려 있으며, 언제든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태도야말로 음모론이 횡행하는 극단적 분열의 시대에 우리를 화합과 평화의 길로 이끌 것이다. 404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