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지난 6일 오후 울산에서 발생한 정전 사태로 15만5000가구의 전기가 2시간쯤 끊겼다. 도로의 신호등이 모두 꺼지고, 가정·상가·병원·공장에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2017년 서울·경기 지역에서 발생한 20여만 가구의 정전 이후 가장 심각한 정전 사고였다.

울산의 변전소 설비 교체 과정에서 29년째 사용한 노후 개폐장치의 내부 절연이 파괴돼 일어난 사고로 추정된다. 개폐장치의 고장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모든 설비가 그렇듯이 정품으로 충분히 자주 교체하는 일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물론 비용이 드는 일이다.

지난달 14일에도 정전 사고가 있었다. 이 때문에 용인 에버랜드의 롤러코스터 T익스프레스가 갑자기 멈춰서는 아찔한 일이 벌어졌다. 평택 변전소의 개폐기 불량으로 발생한 일시적인 전압 강하 때문이었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에 26건의 관련 신고가 접수됐다.

2011년 9월 15일에 발생한 전국적 규모의 재앙적 순환정전 이후 우리의 전력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 지속적인 시설 투자로 발전 설비도 충분히 갖췄고, 송전 설비도 확실하게 개선했다. 변전소의 설비도 단선(單線)에서 공급 신뢰도가 높은 이중 모선으로 바꿨다. 그런 투자와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전기를 넉넉하고 안정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일상생활에서 정전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2020년 기준으로 우리의 가구당 정전시간은 8.9분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소비자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정전까지 포함한 시간이다. 규정 전압 유지율도 99.99%를 기록하고 있다.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품질이다. 참고로 미국의 가구당 정전시간은 54분이나 되고, 독일 12.8분, 영국 38.4분, 프랑스 48.7분, 이탈리아 94분이다. 일본의 홋카이도는 우리와 비슷한 9분대이지만, 오키나와는 7시간이나 된다.

그런데 이제 좋은 시절은 끝나가고 있다. 2018년 507건이었던 정전 사고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2021년에는 738건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무려 933건으로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수도권 남부와 울산의 정전 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전이 소비자에게 세계 최고 품질의 전기를 공급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단순히 정전의 불편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일반 소비자는 눈치채기도 어려운 순간정전과 전압·주파수 불안정으로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훨씬 더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전이 공급하는 전기의 품질이 떨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인 탈원전 때문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200조 원이 넘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한전의 경영이 온전할 리 없다. 당장 한전의 존재 이유인 송·배전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다.

실제로 한전이 송·배전 설비를 유지·보수할 비용을 줄이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도 한전의 송전선 관리 부실과 무관치 않았다. 한전은 지난해 송변전·배전망에 대한 투자비를 6%나 줄였다. 신규 송전망 구축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가가 기간 송전망 구축에 직접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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