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배우 이순재는 “배우는 도둑놈도 해보고 사기꾼도 해보고 왕도 해보고 거지도 해보고 다 해봐야죠. 출연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서 다양한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고 그걸 경험하게 되죠”라고 했다. 더웨이브 제공

■ 내달 연극 ‘리어왕’으로 돌아오는 이순재

‘가난한 자의 삶을 겪어봐라’
리어왕 교훈, 현대에도 유효
동료 세심히 살펴야 신뢰얻어

88세에도 연출·연기 등 다작
나이드는 것은 비극 아니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찾아야

“리어왕이 주는 교훈은 현대에도 적용됩니다. 리더는 군림하지 말고 항상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죠.”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역 최고령 배우’라는 이순재(88) 배우가 6월 1일부터 18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무대에 ‘리어왕’으로 돌아온다. 2021년 ‘이순재의 리어왕’ 이후 2년 만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오만함과 분노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 늙은 왕의 어리석음이 초래한 갈등과 혼란을 다룬 작품이다. 준비가 한창인 지난 16일 충정로역 인근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순재는 ‘리어왕’의 가치관이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그대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 부자들아, 가난한 자들의 삶을 몸소 겪어 봐라.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는 리어왕 대사를 인용하며 배려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백성을 도외시하던 리어왕이 몰락한 뒤 한 말이다. “대통령부터 작은 회사의 사장까지 리더다. 회사 사장이 ‘내일 골프 약속 있어 먼저 갈게’ 하고 나가면 직원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 급한 일이 있어 회사에 못 나오면 족발, 막걸리 사 들고 회사에 찾아가라.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여유, 역량, 판단이 중요하다. 그러면 직원들도 리더를 진심으로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식들에게 죽을 때까지 절대 재산을 넘겨주지 않는 것,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도 그가 생각하는 현실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철학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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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전에도 정점에 올랐다 노쇠해 쇠락해가는 인물을 연기한 적이 있다. 2008년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선 치매를 앓는 오보에 연주자 ‘김갑용’을 연기했다. 당시 그의 연기에 감동한 카메라맨이 울어 NG가 나기도 했다. 최근엔 tvN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에서 치매로 고통받는 ‘배우 이순재’ 역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들을 비극으로 보지 않았다. “순응하고 그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예를 들어 누구를 가르치거나 봉사하며 평생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회를 위해 조금만 기여해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열정은 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12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출했다. 앞으로도 연출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요청이 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선 ‘리처드 3세’와 ‘베니스의 상인’을 연출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 때 로런스 올리비에의 ‘리처드 3세’를 보고 깊게 감명받았다. 본래 리처드 3세는 아주 처절한데 그 부분을 살려보고 싶다”며 “소극 중에선 ‘베니스의 상인’에 관심이 간다. ‘베니스의 상인’엔 유대인의 울분이 있다. 작품 내에선 유대인을 구두쇠로만 여기는데 유대인 입장에선 타국에서 희생하며 열심히 돈 벌고 살았는데 왜 우리를 업신여기느냐는 반응이 나온다. (내가 연출하면) 이런 부분을 작품에 절묘하게 반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88세의 나이에도 쉼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자신의 연출작 ‘갈매기’가 2월 5일에 막을 내리자 지난달 21일에서 이달 21일까지 계속되는 연극 ‘장수상회’ 무대에 올랐다. 이어 ‘리어왕’이 기다리고 7월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다. 그는 도전을 망설이지 말고 야망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우리 민족의 대단한 역량을 젊은 세대가 드러내고 있다. 최근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옛날엔 상상도 못 한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세계를 목표로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성세대의 태도에 대한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30∼40년 전 편견을 젊은 세대에 강요해 오염시키면 안 됩니다.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유민우 기자 yoom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