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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경제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기간 미 의회 영어 연설이 큰 화제가 됐다. 발음, 억양, 음정, 강약, 유머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함 없는 매끄러운 영어 실력에 43분간 56차례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영어 전문가나 능통자 사이에서 “소름 끼쳤다” “대단하다” 등 극찬이 쏟아졌고, 해외 네티즌들도 댓글로 ‘탁월하다(Excellent)’ ‘감동적이다(Touching)’라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윤 대통령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유창한 영어를 선보이는 한국인은 점점 늘고 있다.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재치 넘치는 영어 수상 소감으로 호응을 얻었고,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방한 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영어 환영사도 감탄을 자아냈다. 유학파뿐 아니라, 국내에서만 영어를 배웠는데 원어민급 영어를 구사하는 토종 한국인도 많다. BTS RM이나 드라마 ‘파친코’ 주인공 김민하 배우 등이 대표적이다. ‘영어 정복’이 다수 한국인에게 평생 숙제이자 무거운 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고무적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일취월장한 영어 실력 배경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보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김민하 배우는 인터뷰에서 “유치원 때부터 계속 영어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았다”고 했다. 미드 ‘프렌즈’로 영어를 습득했다고 알려진 RM은 “영화, 영상을 많이 보는 게 좋을 거 같다”며 “영어학원을 20개 넘게 다녔다”고도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은 26조 원으로 전년 대비 10.8%나 증가했다. 이 중 영어(23만6000원)가 수학(22만 원), 국어(13만7000원)를 제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평균비용이 20만 원대라지만, 실상은 영어유치원 하나 보내는 데 매월 최소 100만 원대에서 300만 원대가 들고, ‘명문 영유’에 들어가기 위해 따로 과외 선생님을 구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교육부 조사 결과,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2017년 474곳에서 지난해 811곳으로 불었다. 어학연수 총액은 376억 원으로 205.2% 늘었다. 사교육비 지출을 줄이기 위한 ‘엄마표 영어’도 성행하고 있다.

이쯤 되면 영어 공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학교 영어 교육이 지난 수십 년간 써먹지 못할 문법·입시 위주 ‘K-영어’를 답습하며 제구실을 못 하는 사이 각 가정에 지워진 영어 교육 및 교육비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교육비가 양육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양육비가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효율적 영어 공교육이 저출산의 직접 원인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윤 대통령은 방미 전 영어 연설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한 윤 대통령이 영어 맹연습에 나섰던 것은 그만큼 미국과 영어가 국익에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부모들이 자식 영어 교육에 허리가 휠 정도의 교육비를 기꺼이 내는 것도 그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다. K-콘텐츠가 호평받고 한국인의 글로벌 진출 기회가 늘며 이제 영어로 하는 소통은 기본이자 필수 조건이 됐다. 정부는 그 많은 세금만 쓰고 언제까지 학부모에게 영어 교육을 떠넘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