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투표 무게를 견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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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워싱턴 특파원

미국 연방의회 제118대 회기가 시작된 1월 3일 미 유권자의 시선은 대통령·부통령에 이어 권력서열 3위 하원의장을 선출하는 워싱턴DC 의사당으로 쏠렸다. 다수당 공화당이 일찌감치 케빈 매카시 당시 원내대표를 차기 의장 후보로 뽑았지만, 당내 강경파 반발로 선출 실패 가능성이 점쳐졌다. 의원들이 초청한 배우자·자녀들로 의사당이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기우(杞憂)는 현실이 됐다. 닷새에 걸쳐 15차례 투표가 반복되는 진통을 겪고서야 신임 의장이 탄생했다. 매카시 의장 본인은 남북전쟁 후 163년 만에 최다투표라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의원 한 명, 한 명의 중요성을 확인한 계기였다. 눈길을 끈 것은 의회 서기가 알파벳순으로 부르면 호명된 의원이 지지 후보를 밝히는 투표 방식(roll call)이었다. 공석 1명을 제외하고 의원 434명이 투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인당 10초씩만 잡아도 1시간이 넘는데, 일부는 지지 이유까지 설명하는 통에 투표마다 2시간가량 걸렸다. ‘전자투표면 10분이면 충분한데’라는 불만도 잠시 들었지만, 이내 의원들의 입을 주시하고 손에 땀을 쥐었다. 투표 대상자와 의원들, 유권자 앞에서 이름이 불리고 지지 후보를 밝히는 그 순간만큼은 해당 의원이 바로 미국 정치의 주인공이었다.

2개월도 전 미 의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 것은 2월 27일 진행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과 뒤이은 이른바 ‘수박’(이탈표) 색출 논란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체포동의안은 찬성 139·반대 138·기권 9·무효 11표로 부결됐다. 하지만 당내 이탈표가 최소 30표에 달해 ‘개딸’(개혁의 딸)로 불리는 이 대표 강성 지지자들은 체포동의안에 찬성·기권한 의원을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야권 인사는 ‘인사에 관한 안건은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는 국회법 제112조가 위헌적이고 부당한 무책임 투표 특권이라며 무기명 뒤에 숨지 말고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강요한다. 소신투표를 하려면 무기명이 필수라는 반론에도 중대 인사 사안에 눈치 볼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국민의 대표인 의원직을 넘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불체포특권에 대해서는 부당한 정치탄압을 막기 위한 근본적으로 정당한 특권이라며 결사옹위하고 있다.

독일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가는 정치적 신념에 근거해 지지를 얻고 신념 구현을 위해 투쟁하며 결과에 대해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표결 등 정치적 결정을 하면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제 무기명투표를 재검토할 때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물론 여기서 책임은 개딸 같은 팬덤이 아닌 국민에 대해 져야 한다. 무기명투표를 보장해야 소신투표를 할 수 있다지만, 현실은 지난해 12월 노웅래 민주당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처럼 ‘방탄표결’이 대부분이다. 차제에 불체포특권 역시 내려놔야 한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독재정권에서 부당한 정치탄압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내놓는 ‘체포동의안 기명 표결’ ‘불체포특권 폐지’ 등 공약이 이번 논란을 계기로 현실화하길 기대한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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