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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카페 - 김헌 · 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20) 축제와 국가

아테네선 매년 40개 열어
‘디오니소스 축제’가 최고

일상의 시름 잠시 잊는 날
만약 도 넘은 경거망동땐
신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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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가 필요해.” 여우가 말했다. 어린왕자는 그 뜻을 몰랐다. 의례라고?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들지.” 다른 날들과 다른 특별한 하루, 살맛 나는 날이다. 그날을 목요일로 정하면, “그날 사냥꾼들은 춤을 춰. 그래서 목요일은 놀라운 날이 되는 거야. 나는 포도밭까지 산책하러 나가. 만일에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면 모든 날이 다 그게 그거고, 난 쉴 수가 없게 된단다.” 함께 시간을 정해 어우러지는 의례는 아름답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트로이아 전쟁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10년의 전쟁을 마치고도 귀향까지 다시 10년이 걸렸다. 20년 동안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천하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알키노오스의 궁전에 들렀다. 왕은 영웅을 환대하며 축제를 열었다.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왕이시여, 신 같은 목소리의 노래꾼 노래가 정말 멋집니다. 사람들 마음엔 기쁨 가득하고,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빼곡히 붙어 앉아 그의 노래 듣는군요. 식탁마다 빵과 고기 가득 차려있고, 시동들이 술을 가져다가 술잔 가득 따라주네요. 아,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고단한 일과 숱한 문제들로 일상이 힘겨운 사람들이, 시름을 털어버리고 한곳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면서 회포를 푸는 모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감탄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은 축제를 사랑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며 조각을 새기고 신전을 세운 이유도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삶에서 직면한 문제들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낼 힘이 거기에서 샘솟았을 테고, 삶에 찬란한 빛을 주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자료들은 아테네인들이 일 년에 40여 개의 축제를 열었다고 보고한다. 그 가운데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던 것은 포도농사와 포도주를 관장하는 농부들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였다. 특히 비극경연대회는 축제의 꽃이었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신과 술을 찬양했다. “디오니소스께서 인간들에게 포도주 주셨으니, 그것은 가련한 인간들을 고통에서 풀어준다네. 그것은 또 잠을 주고, 그날그날 고생 잊게 해주니, 그 어떤 약도 그처럼 우리 노고 치유하지 못한다네. 디오니소스께선 부유한 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근심 잊게 하는 포도주의 환희 똑같이 나눠주시네.”(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의 여신도들’)

행여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한 자들이 흥청망청 망가질까? 걱정 마시라. “바코스의 축제에서 정결한 여인은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이오!” 축제는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해방과 건강한 일탈의 시간이고, 곧 다시 돌아갈 일상을 잘 살아나갈 결심과 활력이 넘쳐나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만약 도를 넘어 경거망동한다면, 그것은 축제의 주신에 대한 불경의 죄를 짓는 것이 될 테니까. 참혹한 사고는 축제 참가자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이 잘 지켜지도록 돌보고 다스려야 할 관리책임자들에게 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아고라에 세워진 대규모 간이 객석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아름다운 축제가 한순간 참혹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참사를 미리 막지 못한 아테네 지도자들은 대책을 속히 마련했다. 아크로폴리스 경사면에 단단한 객석을 만들고 경사가 끝나는 지점에 무대와 부속시설을 세우면서 안전한 극장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더 이상의 사고를 막고, 축제의 의미 또한 계속 살려 나갔다.

축제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누리려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다. 그러나 참사의 위험은 항상,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이를 경계하고 미연에 대비하며, 행여 사건이 났을 때 신속하게 수습해나가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책임과 지혜를 가늠하는 중요한 정치적 척도가 된다. 이에 미흡함이 있었다면, 관계자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사죄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삼가, 지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