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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남자의 클래식 -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생애 처음으로 접했던 클래식
치열한 전투 15분 음악으로 표현
전쟁터 그린 LP판 재킷도 강렬

푸틴의 침공후 러시아 혐오 확산
예술에도 빨리 평화 찾아오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클래식 애호가인 아버지 덕에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백색소음처럼 항상 듣고 자랐다. 휴일에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반강제로 듣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개중엔 좋아하는 곡도 있었고, 심지어 좋아하는 작곡가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곡가는 당시 ‘소련’의 차이콥스키(1840∼1893).

기억의 왜곡이 아니다. 차이콥스키는 나의 최애 작곡가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음악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반듯하게 진열돼 있는 LP판을 그림책 삼아 헤집고 놀았다. 오래된 재킷에서 풍기는 고서 같은 냄새가 싫지 않았고, 잘 찾아보면 연주자의 사진 대신 멋진 그림이 새겨진 레코드판 커버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커버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1812 0verture op. 49)이다. 수채화인지 유화인지 모를 강렬한 색채의 전쟁터 그림은 만화책만큼이나 나를 가슴 떨리게 했고, 정중앙의 큼지막한 러시아 대포 그림은 압도적이었다. ‘1812년 서곡’은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에 패한 역사적인 사실을 묘사한 곡이다. 나의 호기심을 발견한 아버지는 냉큼 레코드판을 꺼내어 턴테이블에 걸고는 음악을 들려주셨다. “자, 이제 군대가 정렬한다. 지금 나오는 음악은 프랑스의 애국가야.” “이제 프랑스가 러시아와 한판 붙을 거야.”

아버지의 설명과 함께 시작된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금관 악기의 우렁찬 사운드와 함께 기세를 드러냈다. 실제의 전쟁을 묘사하듯이 음악 중간에 대포 소리가 펑펑 울리기도 한다. 프랑스군에 밀려 작아지던 제정 러시아의 국가가 점점 커지면서 전세가 역전됨을 알리고, 프랑스의 국가는 점점 작게 사그라들다가 어느새 소멸한다. 전투의 승리를 알리듯 제정 러시아의 국가는 축복을 의미하는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힘차게 울려 퍼진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차이를 몰랐던 당시 나에겐 ‘악당’ 이미지이던 공산 국가의 승리로 끝나는 게 영 찜찜했지만 음악으로 표현된 15분간의 전투는 어린 소년에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했다. 누군가 내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억을 거슬러 가장 처음 클래식 작품을 알게 되고 제목까지 익힌 곡이 바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라고.

혹자는 ‘역시 음악 하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듣는 귀가 열려 있었군’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은 ‘1812년 서곡’ 재킷의 그림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중앙에 그려진 커다란 대포 그림이 한 소년에겐 클래식 음악으로의 문을 열어준 트리거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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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에겐 첫사랑과도 같은 이 작품을 요즘은 선뜻 들을 자신이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항해 일고 있는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에 필자 역시 일부 공감하기 때문이다. 최근 공연계에선 러시아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보이콧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정상급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퇴출됐고,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반전 메시지를 내고 나서야 겨우 유럽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작품들 또한 프로그램 목록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1812년 서곡’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은 제정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침공한 것이 아닌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항해 승리한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를 생각한다면 필자는 현시점에 러시아의 대포 소리와 승전의 음악이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우크라이나와 더불어 예술에도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