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영국 공영방송 BBC가 100주년을 맞은 지난 18일 런던의 BBC 본부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 Global Window

BBC 방만 경영·공정성 논란
영국인 95% “수신료 없애야”
NHK, 비판여론에 혁신 나서
네덜란드·대만도 수신료 폐지

“당신은 BBC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 BBC는 당신 것이니까.”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지난 18일 공영방송 BBC 창립 100주년 기사에 붙인 헤드라인이다. 해당 문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영방송인 BBC의 위상과 위기를 동시에 깨닫게 한다. 인디펜던트는 “BBC는 오랫동안 영국을 정의하는 문화적 힘이었고, 우리가 외부 세계 및 스스로와 소통하는 통로였다”며 “그러나 바로 이런 편재성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고 창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BBC의 현실을 짚었다.

실제로 BBC는 오는 2027년 시청료 폐지 절차를 시작한다. 전 세계 주요 외신들은 “BBC가 100년의 역사 끝에 개혁을 위한 수술대에 오를 운명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비단 BBC만의 문제는 아니다. ‘방만 경영’으로 공격받던 일본 공영방송 NHK는 내년 10월부터 지상파방송과 위성방송 모두 수신료를 10%씩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신료 때문에 살고, 죽는다…공영방송 숙명 짊어진 BBC의 추락=1922년 10월 18일 출범한 BBC가 10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던 건 주 수입원인 ‘수신료’ 덕택이다. 2020∼2021년 전체 수입 50억6000만 파운드(약 8조960억 원) 중 시청료 수입이 74%를 차지한다.하지만 영국은 지난 1월 공영방송 수신료를 2024년까지 159파운드(약 25만 원)로 동결하고, 왕실 칙령이 허용한 2027년까지 수신료를 유지하되 2028년부터 폐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나딘 도리스 문화부 장관은 “자금 조달과 지원, 판매에 대한 새로운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해야 한다”며 “수신료를 못 내 집행관들이 찾아오고, 실형을 선고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영국 정부가 BBC 수신료 폐지를 전격 결정한 데에는 시청자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 응답자 95%가 BBC 시청료 의무 납부 폐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BBC는 수익 창출원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수신료를 낸 영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BBC iPlayer’를 비롯, 넷플릭스·디즈니 등을 겨냥한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VOD)인 ‘브릿박스(BritBox)’를 2017년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젊은 시청자들을 대부분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빼앗긴 상황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방만 경영과 과다한 직원 수다. 수신료의 힘으로 스튜디오와 제작 시설을 끝없이 만들어온 BBC는 시대의 흐름 속 역할이 없어진 고소득 무보직 직원과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져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스튜디오 유지비까지 짊어지고 있다.

여기에 백인 남성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비판과 정·언 유착 논란도 있다. BBC 보도가 영국 왕실과 주류 기자, 정치 컨설턴트 등 런던 출신의 백인 남성 엘리트 위주라는 비판이 있는 것. 반면 보수당은 BBC가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술 파티 등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다는 점을 들어 ‘BBC는 좌파’라고 비난하고 있다. 공영방송에 최우선으로 요구되는 ‘공정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인상을 시청자에게 남길 수밖에 없다.

◇日 NHK도 국민 비판 여론에 수신료 10% 자진 삭감…캐나다·이스라엘 등도 철폐= 수신료 삭감은 비단 BBC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내년 10월부터 지상파방송과 위성방송 모두 수신료를 10%씩 인하하겠다고 12일 발표했다. 지난 2020년 10월 수신료를 인하한 지 2년 만에 추가 인하 방안을 밝힌 것이다. 방만 경영으로 국민적 비판을 받는 NHK는 당초 위성방송 수신료만 인하하려 했다가 여당인 자민당이 “시청자 입장에선 지상파방송 수신료도 인하하는 것이 맞다”고 압박하자 입장을 바꿨다. NHK 수신료 인하는 지난해 1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당시 총리의 발언이 시발점이었다. 스가 총리가 “NHK가 10% 이상의 월 수신료 인하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통신비 인하’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당시 다케다 료타(武田良太) 총무상에게 재검토를 지시했던 것. 집권 자민당의 압박에 NHK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신료 인하 결정을 내렸다. 마에다 데루노부(前田晃伸) NHK 회장은 당시 회견에서 “NHK를 진정한 의미의 슬림하고 강인한 조직으로 바꾸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본 NHK처럼 수신료 부담을 줄이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다. 스페인의 경우 2009년부터 통신사업자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 중 일부를 공영방송 재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뉴질랜드, 호주 등은 수신료 대신 정부 기금에서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캐나다, 이스라엘, 대만 등도 이미 국민이 직접 부담하는 수신료 제도는 사라졌다. 이 같은 전 세계발(發) 공영방송 수신료 인하 추세는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 공영방송 KBS의 행보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당신들이 만드는 콘텐츠가 ‘수신료의 값어치’를 하는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KBS를 포함해 전 세계 공영방송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