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이 지난 8월 3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동아수출공사 회장실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 영화가 세계에서 최고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포즈를 취했다. 윤성호 기자

■ M인터뷰 - ‘한국 영화계의 거장’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

강제징용 父따라 3세에 日 갔지만 폭력 당해 장애 입어
광복으로 돌아왔을 땐 말 서툴다며 놀림… 5학년에 중퇴
‘미워도 다시 한 번’시리즈 수출로 승승장구…‘한류’ 원조
‘만추’ 등 85편 만들고 ‘늑대와 춤을’ 등 250여 편 소개
집·극장·빌딩 팔아 영화제작… 첨단 실내 스튜디오 개관
공로 인정받아 훈장만 2개…내달 15일 회고록 출판기념회

이우석(88) 동아수출공사 회장은 평생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다. 한국영화의 메카라 불리는 충무로를 이끌어 온 산 역사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 출퇴근하며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안성기 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을 비롯해 ‘바람불어 좋은 날’, ‘만추’, ‘겨울 나그네’, ‘칠수와 만수’ 등 85편에 이르는 한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대한민국 영화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김수용 김기영 이장호 배창호 곽지균 정지용 문여송 홍상수 박광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이 동아수출공사를 거쳐 갔다.

김지미 안성기 이대근 윤정희 김혜자 강수연 이덕화 임예진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김자옥 신일룡 문성근 원미경 하재영 강석우 이미숙 박중훈 배종옥 나영희 등이 7080년대 ‘이우석 제작’의 스크린을 통해 눈부시게 스타로 떠올랐다.

‘007 죽느냐 사느냐’, ‘늑대와 춤을’,‘원초적 본능’, ‘취권’ 등 그가 들여온 외화도 250여 편에 이른다. 중국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들여와 당시 시청률 30%를 넘어서는 국내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한국 영화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도 이 회장이 기초공사를 잘 다진 덕이다. 영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1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2011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회고록 ‘영화에 살다- K시네마 태두 이우석’의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이달 중 출간을 앞두고 있는 그를 8월 19일과 31일 두 차례 서울 강남구 도곡동 동아수출공사 회장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두 개의 훈장을 비롯해 70년 가까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받은 상장과 패, 영화 포스터와 사진들이 전시장에 온 것처럼 화려하게 장식돼 있어 눈에 띄었다.

회고록은 그의 우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진솔한 기록이자 대한민국 영화 100년사에 소중한 자료다. 오는 10월 15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미수(88세) 축하연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한국 영화의 거장이 쌓아 온 인맥을 보면 가히 놀랍다. 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수차례 골프로 친분을 다지며 부부동반으로 식사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우석 동지에게’라고 직접 쓴 ‘대도무문(大道無門)’휘호도 보여줬다. 김 전 대통령과는 재야 지도자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친분을 나눈 사이다.

슬하에 1남 2녀 결혼식 주례가 모두 3부 수장 출신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아들은 김용철 전 대법원장, 첫째 딸은 김재순 전 국회의장, 둘째 딸은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주례를 서 주셨어요. 그랬더니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내 차례는 언제 오냐’고 농담하셨지요. 허허허”. 휴대전화에 저장한 앨범에는 영화인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스포츠계, 정·관·재계 고위 인사들과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이 지난 8월 31일 공사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1991년 제작된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 포스터 앞에서 수입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화려한 인맥이 영화사업을 하면서 든든한 배경이 됐을 것 같다고 질문하자 그는 “정직이 내 최고의 ‘빽’”이라고 강조했다. “정직하게 살면 적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보답이 따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화일보가 미리 입수한 그의 회고록에는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전 문화부 차관)이 쓴 축하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50여 년 넘도록 이우석 회장과 친교를 맺어 오고 있지만, 문화공보부나 영화진흥공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업무’와 관련해 그에게 부탁을 받아본 일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성품이 우직하고 성실하다. 정부에 근무했던 많은 전직 관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도 그의 한결같은 성품 때문이다’.

이 회장의 인생 스토리를 들여다 보면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탄광촌으로 간 아버지를 따라 3세 때 어머니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일본 애들한테 자기네 식민지에서 온 조선인이란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고 구타를 당했어요. 나에게 ‘항복하면 안 때리겠다’고 했는데 ‘내가 너희들한테 뭘 잘못했길래 항복하란 말이냐’며 끝내 안 했어요. 미련했던 건지, 눈 딱 감고 ‘항복’이라고 했더라면 덜 맞았을텐데…. 이때 코뼈가 부러지고 휘어졌으나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비염을 앓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얼굴을 뒤로 젖혀 휘어진 코를 자세히 보여줬다. 코가 오른쪽으로 휘어 있다. 당시 겪은 고초로 장애인 등급을 판정받아 평생 남모를 고통을 안고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일본에 계속 있다간 죽을 것 같아 광복이 되자 가족이 함께 귀국해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이번엔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인처럼 생겼다’며 놀림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도 못 하고 5학년 때 중퇴했지요. 이때부터 먹고살기 위해 뭐든지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부터 안 해 본 것이 없었어요”

그러다 18세 무렵 친구가 부산 동아극장 입회원으로 일할 때 입회 보조원으로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면서 친구 아버지의 무역회사에 취직해 당시 무역 품목 중 하나였던 외국 영화 수입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1958년 23세 때 그 회사 서울 본사로 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됐다.

1960년대 초 홍콩에 한국영화유한공사를 설립해 우리 영화를 홍콩에 처음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7년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던 부산 동아극장에서 ‘동아’를 따오고, 우리 영화를 해외로 수출하겠다는 목표로 ‘수출’을 붙여 ‘동아수출공사’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창립해 대박이 났어요. 한국 영화사에서 대표적인 흥행영화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 제작)시리즈를 대만에 수출해 크게 성공한 거죠”.

영화 한류의 첫 테이프를 끊은 주인공이 바로 이 회장이다. 한국의 수출품이 가발에 의존하던 때에 영화를 수출해 돈을 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전설적인 배우 이소룡(李小龍·브루스 리)이 죽으면서 빈자리를 차지한 청룽(成龍)을 무명시절부터 가족처럼 돌보면서 ‘취권’을 비롯해 그가 출연한 영화를 독점하면서 국내에 소개했다. 중장년층이 젊은 시절 즐겨보았던 청룽의 영화들이 모두 이 회장이 수입한 것이다. 이밖에 ‘007 죽느냐 사느냐’ 등을 수입하면서 돈을 크게 벌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외국 문화를 접하기 힘들었던 시기에 우리 국민들이 외국 명작들을 볼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숨은 노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이 지난 8월 31일 회장실에 전시돼 있는 각종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그러나 성공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위기를 맞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 흥행에 성공한 대작 ‘공군대전략’을 1969년 거액을 들여 야심차게 수입했으나 우리나라에선 서울부터 참패했습니다. 입장료 선수금도 해결하지 못해 다음 상영지인 부산에 필름을 보내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 절박한 상황에서 피카디리극장 사장은 ‘자넨 절대 거짓말할 놈이 아니다’며 필름을 내주었고, 나는 급히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 동아극장으로 내려갔어요. 결국 영화는 망했지만 나는 신용과 정직의 힘으로 일어나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1세대 영화사 20여개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곳은 동아수출공사가 유일하다. 또 1세대 영화 제작자로서 여전히 현역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도 이 회장뿐이다. 그는 영화에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 최고의 소설가로 명성을 날렸던 소설가 최인호를 영입해 그의 소설 대부분을 영화화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지만, 영화계에 내 이름 석 자는 꼭 남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고, 그 꿈은 이뤄졌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내가 영화계에서 이만큼 성공한 것은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하늘이 돕지 않고서는 스스로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지난 5월 외길 영화인생 마지막 꿈과 땀의 새로운 결실을 보았다. 약 6600㎡ 규모 첨단 영상제작 실내 스튜디오 ‘넥스트 스튜디오 인천’을 개관한 것이다. 세트 촬영과 특수 촬영이 가능한 대규모 스튜디오다.

“당초 100편의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내가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곳에서 아들 이호성 동아수출공사 사장이 이뤄줬으면 좋겠습니다”.

163cm, 58kg의 작고 다부진 이 회장은 “영화를 만들고 수입해 번 돈으로 사들인 서울 강남 동아극장과 장충극장, 빌딩과 서울 우면동에 있던 5000㎡에 이르는 저택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두 팔아 제작비로 쏟아부어 이제 아파트 한 채만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동아수출공사라는 한국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영화사 간판이 지켜주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우석 회장 회고록 ‘영화에 살다- K시네마 태두 이우석’표지

■ 88세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건강비결
-365일 아침 식사는 콩나물국 … 골프 69타까지 쳤지만 올해부터 그만둬

‘무병단명 일병장수(無病短命 一病長壽)’라는 말이 있다. 병이 없는 사람은 명이 짧고, 한 가지 병이 있으면 몸 관리를 잘해서 오래 산다는 말이다.

‘한국 영화계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을 만나고 나서 이 말이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본 아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뼈가 부러져 휘어진 코를 제때 치료받지 못해 평생토록 비염으로 고생하며 살았다. 지금까지 5차례 수술을 했으나 너무 오래된 병이라 결국 회복하지 못해 지금도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장애인 등급도 받았다. 당뇨가 있으나 그것 말고는 아픈 곳이 없다.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에 들어서자 건식 족욕기에 발을 넣고 있었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그만의 건강 관리법이다.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땐 늘 이용한다. 그는 아침 5시 30분 기상해 30분간 맨손체조로 하루를 시작한다. 양손을 비벼서 열을 낸 다음 얼굴 전체를 마사지한다. 눈 밑을 누르고 열 손가락을 오므려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준다. 이 동작은 아침뿐 아니라 수시로 한다. 인터뷰 도중에도 수차례 선보였다.

아침 식사는 콩나물국이다. “1년 365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건강식”이라고 했다. 조반 후엔 자택 인근에 있는 양재천에 나가 1시간 정도 걷기를 한다. 하루 평균 5000~6000 보를 걷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출퇴근도 걸어서 한다. 휴대전화기에 설치된 만보기 앱을 보여줬다. 1만 보를 훌쩍 넘는 날도 있었다. 점심 식사는 주로 회사 인근 단골집에서 해물 비빔밥과 딸려 나오는 미역국을 즐겨 먹는다. 오찬으로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메뉴는 해물 비빔밥이었다. 비빔밥을 미역국과 함께 깨끗이 비웠다. 대식가다. 7시 아침 식사, 12시 오찬, 오후 6시 저녁 식사를 규칙적으로 한다.

운동은 30대부터 골프를 즐겼으나 올해부터 하지 않고 있다. 최고 스코어는 69타로 프로급 수준이다. 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라운딩을 수차례 즐겼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기념사진을 보여줬다. 라운딩 멤버들이 정·관·재계는 물론 문화·스포츠계 인사까지 다양했다. 마당발이다. 적이 없는 특유의 친화력에 원만한 성격이 그의 건강 비결이다. 특히 “욕심을 내려놓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관리가 최고의 건강법”이라고 했다.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