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고발·민주화 헌신…‘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아버지

■자랑합니다-이종찬 김산(장지학)기념사업회 회장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을 던진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함석헌 선생 등이 외치는 ‘유신 철폐’ 현장을 체험하셨다. 애국지사 장준하 선생이 암살되자 상가에 모인 재야 인사와 뒤엉켜 땅을 치고 울부짖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며 성장한 아버지는 신민당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신한민주당·민주화추진협의회를 거쳐 1987년 6·10민주항쟁의 대오에 나섰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그러자 3당 합당을 반대한 노무현 의원 등이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민주당을 창당했고, 아버지 또한 최연소 중앙상무위원 직을 던지고 합류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 초청으로 출국,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에 참여하면서 정치인의 길에서 비켜섰다. 하지만 폭압 정치로 암울했던 시대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인생은 성패를 가르는 경기가 아닌 자신의 꿈을 기록하는 행군의 시간’은 나에게 ‘역경지수(AQ)’ 척도가 됐다.

나라를 잃고 중국으로 망명 유학을 떠나 일본군과 싸웠던 큰할머니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베이징(北京)에 남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할아버지를 통해 “18세기는 영국의 세기, 19세기는 영·미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며 중국 진출의 준비를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1983년 중국연구소를 설립하고 한·중 수교 전 중국에 진출해 큰할머니의 주선으로 덩샤오핑(鄧小平) 가족, 대문호 루쉰(魯迅) 가문과 친분을 쌓았다. 중국 DNA를 심어 놓고 떠난 할아버지와 한·중 양국의 미래사회 발전에 공헌한 아버지의 그 길을 나는 걸어갈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할아버지는 일본에 빼앗긴 금수강산을 되찾겠다며 국외로 떠난 애국지사들을 따라 심부름꾼 역할을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선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맥을 잇기 위해 초석을 놓은 ‘한국사회공헌재단’을 이어받았다. ‘기록을 올바르게 정리해서 진실의 역사를 남기라’는 할아버지의 유지가 신념으로 굳어져 경주 최 부자를 효시로, 우당 이회영 가문과 유일한 박사로 이어져 온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숭고한 인간애는 수많은 ‘기부천사’를 탄생시켰다. 정직한 기부를 통해 행복한 공동체와 아름다운 미래사회 가치를 꿈꾸는 김범수, 김봉진 ‘뉴리치(New Rich)’의 천문학적인 사회공헌은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새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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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고 볼 수 없는 일은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파가 사죄와 반성도 없이 ‘기부천사’로 포장하고 오로지 자신의 사익 추구를 위해 선조들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일궈 낸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사를 참칭하는 것이다. “나의 잘못된 판단이 나를 속이는 그날이 오기 전에 이를 방치할 수 없다”고 하시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부역하면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A 씨를 국민 앞에 공개했다.

젊은 시절 거침이 없었다는 다산 선생처럼 촌철을 품고 산 아버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끝까지 추적해 ‘정의봉’으로 심판한 박기서 의인의 희생정신에 자신을 맡기고 친일파 A 씨를 법정에 세워 일본군 장교로 부역했다는 사실을 자백받았다. “가족은 신의 선물”이라는 할아버지의 생전 말씀이 떠오르는 고향 마을 청와대 앞길을 걸으며 친일파 고발 양심수인 아버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외동딸 이주홍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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