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물과 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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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수확이 한창이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수확하려면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수놓는 가을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풋고추는 지금이 한창이다. 어떤 작물이든 ‘풋’이 붙으면 덜 익은, 그래서 먹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지만 풋고추는 다르다. ‘풋’은 ‘풀’에서 유래한 것이니 푸릇한 풀색을 띤 시기의 고추 또한 나름의 맛이 있고 그래서 쓸모가 있다. 그러니 풀색이 가장 푸른 이때가 풋고추를 즐기기에 가장 좋다.

그래도 역시 고추는 붉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여름과 초가을의 따가운 햇볕이 붉은색과 매운맛을 키울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고추가 붉어지면 농부는 ‘맏물’을 딴다. 맏물의 ‘맏’은 ‘맏이’에 쓰이는 그것이다. 맨 처음 얻은 자식처럼 가장 먼저 딴 고추를 맏물이라 한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수확한 후 상한 채로 마르기 시작하는 희아리가 생기기 전에 ‘끝물’을 딴다. 끝물의 ‘끝’은 말 그대로 맨 마지막을 가리킨다.

‘맏물’과 ‘끝물’은 ‘맏’과 ‘끝’의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 ‘끝’이 명사이니 그와 짝을 이루는 ‘맏’도 명사여야 할 텐데 오늘날에는 아니다. 과거에는 명사로도 쓰이던 ‘맏’이 오늘날에는 새 말을 만드는 첫머리에만 쓰일 뿐이다. 그 자리는 ‘처음’과 ‘첫’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맏물’보다는 ‘첫물’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고추가 선사하는 매운맛은 ‘맏맛’으로 먹는다. 입술에 닿는 순간 화끈하게 아파 오는 첫맛이 곧 매운맛이다. 만일 얼얼함이 끝맛으로까지 남는다면 재료 본연의 맛이나 다른 맛을 덮어버리니 바람직한 맛은 아니다.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가 시뻘겋게 되는 것은 우리 음식 문화와 건강에 모두 해롭다. 풋고추처럼 맏맛은 맵되 끝맛은 달큼하게 올라오는 정도의 매운맛이라면 어떨까? 풋고추는 덜 익은 고추이지만 덜 든 매운맛이 입맛을 돋운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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