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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16) 물의 도시 ‘베네치아’

이미지 크게보기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모습. 관광객들은 곤돌라를 타고 도시 곳곳을 이동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물의 도시 이길 건 공중에 지은 도시뿐” 예찬
‘베니스 상인’엔 9세기 이후 지중해 무역으로 富 쌓은 도시 정체성 오롯이

‘대항해 시대’열리며 무역 주도권 잃고 몰락
‘쾌락 상징’카사노바는 영웅이자 ‘자유·모험의 베네치아’그 자체

베네치아는 액체의 도시이다. 단단한 성벽 대신 넘실대는 물결이 도시를 지킨다. 베네치아를 이루는 것은 섬 118곳, 운하 150개, 다리 378량이다. 베네치아인들은 진흙땅에 단단한 나무 기둥을 무수히 박고,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도시를 건설했다. 영국 작가 윌리엄 해즐릿은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찬양했다. “이 물의 도시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공중에 지은 도시뿐이다.”

베네치아에서는 바다가 도로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곤돌라와 수상 버스를 타고, 잔잔한 수면을 따라 도시 곳곳을 이동한다. 유랑가객의 노래와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마르코 광장, 라페니체 극장, 두칼레 궁전, 리알토 다리 등의 장려한 건축물이 물속의 신기루처럼 사람들을 매혹한다.

“그녀를 위해 세레나데를 불러 주고 싶소. 당신은 기타를 연주하고 나는 노래를 하는 거요. 곤돌라를 타고 창가 아래를 떠돌면서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거요. 해가 지고 나면 완벽할 거요. 벽에 있는 전등들이 적당한 빛을 보내 줄 테니까 말이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크루너’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한물간 가수인 토니 가드너는 아내 린디와 베네치아로 이별 여행을 왔다. 부부는 서로 너무나 사랑했기에 상대 안에서 안주하며 몰락하는 대신 품위 있고 우아하게 헤어지기로 했다. “그녀는 아직 늙지 않았소. 가능성이 남았을 때 출구를 찾아야 한다오. 다시 사랑을 찾을 가능성, 다른 결혼을 할 가능성 말이오.” 낭만과 사랑의 도시 베네치아가 아니었다면 이런 설정은 현실성을 잃었을 것이다.

곤돌라에서 부르는 토니의 노래, 호텔 창으로 새어 나오는 린디의 흐느낌, 바다의 물결 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토니는 말한다. “나는 이제 스타가 아니라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영광에 만족하고 살 수도 있소.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아니,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고 말이오.”

‘아직’이라는 부사는 회한이 희망을 연주할 때 악보에 기록된 음표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노시인 아셴바흐를 미소년 타치오의 관능 속에서 구원하지 않는가. 괴테, 바그너, 니체, 릴케 등이 이 도시에서 영혼의 우울을 씻어 내고 기쁨을 얻었다. 니체는 노래했다. “나의 행복이여, 나의 행복이여!” 문학에서 베네치아는 재생과 구원, 도전과 모험의 도시이다.

베네치아인들이 물 위에 도시를 건설한 것은 5세기부터다. 훈족에 쫓긴 파도바인은 석호의 작은 섬으로 피란해 마을을 이루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도, 로마의 교황도 지켜 주지 않았기에, 이들은 스스로 대표를 선출하고 자치 도시를 이룩해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8세기 이후, 베네치아는 침략과 약탈을 피해 리알토 섬으로 중심지를 옮기면서 바다의 도시가 됐고, 난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 갔다. 농경지가 거의 없는 자그마한 도시국가였기에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828년 상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성 마르코의 유골을 가지고 와 도시의 상징물로 삼았고, 베네치아는 비상하기 시작했다.

9세기 이후,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아드리아해 동쪽의 섬들을 점령해 전진기지로 삼고, 소금 무역을 독점해 부를 늘렸으며,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동지중해와 에게해의 패권을 쥐었다. 중국에서 출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동서무역의 마지막 경로를 지배하면서 번영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의 화물 선적을 맡고, 해군력을 제공하면서 동지중해 지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그들은 경악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 1204년 원정군을 충동질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한 것이다. 베네치아인들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 등에 있는 찬란한 문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상업 국가 베네치아는 전쟁을 신적 정의 실현보다는 욕구를 충족하고 실리를 확보하는 거래의 일종으로 다룰 줄 알았다. 덕분에 그들은 인도의 향료와 중국의 비단을 들여와 유럽 내륙으로 실어 보내고, 말리의 황금을 가져와 금화 두카트로 바꾼 후 유럽 전체의 금융을 지배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았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무역과 금융’이라는 베네치아인의 정체성을 압축해 보여 준다. 베네치아의 무역과 이권은 여러 민족의 협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역업자 안토니오와 금융업자 샤일록은 계약으로 묶여 있으며, 베네치아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그 법에 따라 포셔는 살은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다. 셰익스피어는 베네치아의 운영 원리를 꿰뚫어 보았다. 인륜과 도덕보다 신용과 이익을 앞세우는 상인의 세계관이었다.

1300년 베네치아의 모든 섬에 건물이 들어섰고, 섬 사이엔 다리가 놓였으며, 인구는 10만 명에 도달했다. 이 시기의 영웅은 마르코 폴로였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몽골 제국의 무역로를 타고 베이징(北京)에 이르러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스무 해 가까이 중국에 머물면서 곳곳을 여행한 그는 1295년 베네치아로 귀환해 ‘동방견문록’을 남김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베네치아의 랜드마크인 산마르코 광장. 게티이미지뱅크

중세 후기 내내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해상 제국이었다. 베네치아는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하느님의 도시’라는 이미지 구축에 열을 올렸다. 산마르코 성당과 붉은 종탑이 있는 광장이 그 중심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은 광장 주변 곳곳에 궁전을 짓고, 예술가들을 후원해 거리를 꾸몄으며, 약탈한 미술품들을 배치해 도시를 장식했다. 두칼레 궁전은 카이로의 이븐 툴룬 모스크를, 아르네살레 병기창은 이슬람 작업장을 차용하는 등 이슬람 도시를 베껴 ‘유럽의 수도’가 되고 싶어 했다. 무력을 통한 정복과 약탈, 해상 패권 확보를 통한 번영이라는 베네치아 모델은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적 원리가 됐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전후로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지중해 패권을 두고 몇 차례 전쟁을 벌였다. 1416년 갈리폴리 전투,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나, 1573년 동지중해의 요충지인 키프로스를 빼앗기면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오셀로’에서 셰익스피어는 당대 베네치아의 이미지를 이용해 오셀로를 파멸로 몰아간다.

휘황한 상업 도시 베네치아는 교활하고 사악한 남자들과 ‘아름답고 접대 잘하고 자유롭게 말하는’ 부정한 여자로 가득한 환락의 온상이었다. 남녀노소가 가면을 쓴 채 참석하는 베네치아 축제에서는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이들이 에로틱한 환상을 마음껏 즐겼다. 무역 도시 특유의 개방성과 혼종성, 화려함과 활달함이 불온한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바이런은 “베네치아는 모든 민중을 위한/ 환락의 놀이터”라고 노래했다.

베네치아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대항해 시대의 개막이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 항로를 개척하고,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로를 발견하면서 지중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떨어지고, 오스만 제국의 공세가 강화돼 크레타 섬 등을 상실하면서 베네치아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1797년 나폴레옹 정복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가 1866년 독립운동 끝에 통일 이탈리아에 귀속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몰락의 시기에 베네치아의 영웅은 자유인 자코모 카사노바였다. “살아오면서 나는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회상록) 감각과 쾌락의 시대를 상징하는 카사노바는 탁월한 말솜씨, 폭넓은 교양, 넘치는 재기로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귀고, 금기를 뛰어넘어 수많은 여성과 사랑을 나눴다. 카사노바는 인간성의 솔직한 발현을 주장한 계몽 사상가이자 호기심에 사로잡혀 세상을 떠돈 모험가였다. 로타 뮐러는 “베네치아는 뿌리 뽑힌 채 바다에 떠 있는 꽃처럼 유영하는 모험의 도시”라고 말한다. 베네치아가 곧 카사노바, 자유와 모험의 도시였다는 얘기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더워지는 지구, 녹아내리는 빙하, 높아지는 해수면 때문에 물의 도시에서 ‘물속의 도시’로 변하고 있다. 인류의 위기를 넘어 베네치아가 퇴락을 벗어던지고 활력과 모험을 되찾을 수 있을까.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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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은 1271년 베네치아에서 출발해 몽골 제국을 여행하고 1295년 귀국할 때까지 마르코 폴로가 스물다섯 해 동안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책이다. 원제는 ‘세계의 서술’. 북으로 시베리아 극지에서 남으로 자바와 잔지바르까지, 동으로 일본에서 서로 아나톨리아까지 아시아·아프리카 전 지역을 상인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유럽인의 머릿속에 거대한 충격과 함께 ‘모험의 충동’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항해시대’를 열어 베네치아의 몰락을 가져온 바스쿠 다가마도, 콜럼버스도 모두 이 책의 애독자였다.

카사노바 회상록

말년의 카사노바가 자신의 인생 편력을 우아한 프랑스어로 기록한 작품. 전 12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18세기 유럽 사회의 풍속과 생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 낸 수작이다. 자신의 여성 체험을 담은 에로틱한 묘사로 인해 오랫동안 금서였다가 1960년대에 무삭제판이 출간되면서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