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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글을 ‘겨우’ 쓴다. 삶과 글이 직접성의 관계로 만나는 글쓰기를 꿈꿔 왔으나, 그것은 도달하기 어려웠고, 여전히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김훈 작가가 최근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를 출간했다. ‘남한산성’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 한국 문학에 이정표가 된 명작을 연이어 발표하고도, 그는 “겨우 쓴다”고 했다. 신간 끝에 붙인 ‘군말’에선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며 몸을 낮췄다. 그는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 걸까. 지난 2일 전화와 서면을 통해 만난 김 작가는 “‘날것’인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겨우’는 이 날것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한, 그만의 수사다.

꿈꾸며, 그리워하며, 겨우 쓴다.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 나온 지는 2년이지만, 소설 여러 편을 묶어 내는 건 2006년 ‘강산무진’ 이후 무려 16년 만이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 역사적 시공간을 벗어나, 인간이 아닌 말을 주인공으로 ‘환상 문학’을 시도했던 김 작가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썼다”는 표지의 고백처럼, 이번에는 일상적인 인물과 사건을 주로 다루며 ‘지금, 여기’를 이야기한다.

책에는 늙은 수녀들의 마지막 때를 그린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를 비롯해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에 나선 젊은 군인의 사연(‘48GOP’), 기약 없는 미래를 위해 노량진으로 내몰린 9급 공무원 준비생들(‘영자’), 각자 비극을 품고 모르는 상대와 장기를 두며 저물어가는 노년의 풍경(‘저녁 내기 장기’) 등 그 대상에 ‘바싹’ 붙지 않고는 도저히 쓸 수 없는 핍진한 소설 7편이 실려 있다. 김 작가도 “이웃에 속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웃의 삶에 밀착해서 썼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하나하나 밀도 높은 서사를 보여주지만, 이것은 그가 단편 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싹 붙고 나면 글을 데리고 물러서기 어렵”기 때문에. 십수 년간 7편만 쓰진 않았을 터, 그는 “써 놓고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은 다시 손보지 않고 모두 버렸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 신작은 ‘겨우’ 쓰는 그에게서 살아남은, 여전히 유효한 ‘귀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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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무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일이다. 예컨대, ‘명태와 고래’에서 명태잡이 어부 이춘개는 “조류가 세고 풍향이 바뀌어서” 북한 바다로 밀려갔다가 6개월 만에 송환된다. 돌아와서는 경찰서로 끌려가 북쪽에서 했던 진술을 반복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진술들이 빌미가 돼 간첩으로 몰리고 십수 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냥 휩쓸려서” 그리됐다. 작가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이나 절망과 관계없이 무심하게 흐른다는 걸, 나약한 인간은 그 비참한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냉정한 필치로 묘사한다. 또,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한 연민이 가득한 ‘영자’는, 노량진 고시촌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이들이 밥을 먹기 위해 길게 늘어선 노점 줄에서 단 한 명만이, 혹은 100여 명이 입주한 고시원에서 단 한 명만이 그해 공무원이 된다는 잔인한 진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노량진 젊은이들을 여러 차례 만나 술을 마시며 대화했다는 김 작가는 “1인당 소득 200달러 시대를 살아온 나의 청춘 시절보다 3만 달러 시대의 청춘들이 더 가엾고 오갈 데 없으니, 세상은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탄식했다.

거센 조류에 휩쓸려서 비극의 언저리에 가 닿고, 세상에 진입하려 애쓸수록 밀려나는 게 인생이다. 작가는 이러한 삶의 쓸쓸한 단면과 잔혹한 세태를 포착해 이번 책을 쓰면서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고,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고 토로했다. 비루한 인간사와 사람을 조롱하는 시스템을 알리는 것으로 문학이 소임을 다했다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김 작가는 “아무리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7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꾸준히 개선해왔지만, 또 다른, 더 큰 문제들을 일으켜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망하고 분노하며 소설을 썼다는 김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실린, 호스피스 수녀원의 풍경을 담은 ‘저만치 혼자서’를 쓸 땐 “편안했다”고, “가엾은 존재들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생의 비애와 제도의 부조리함을 넘어, 책은 다소나마 애틋하게 끝을 맺는다.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늙은 수녀들의 마지막 삶을 성심껏 보살피는 젊은 신부를 다독이는 바로 그 말처럼.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박동미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김훈 신작 ‘저만치 혼자서’

(※다음은 김훈 작가와 나눈 대화의 일부를 정리했다.)

-2006년 이후 처음 내는 소설집이다. 김훈의 단편은 귀하다고들 말한다. 단편 쓰기란 어떤 의미인가.

“단편은 고밀도, 고농축의 긴장이 필요하다. 나는 단편 읽기를 좋아하고, 단편 쓰기를 두려워한다.”

-‘겨우 쓴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겨우’는 무엇을 함축하고 있나.

“엄살이 아니다. 나는 모든 글을 마지못해서 ‘겨우’ 쓴다. 삶과 글이 직접성의 관계로 만나는 글쓰기를 꿈꾸어왔다. 도달하기 어려웠지만, 여전히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날것’인 글을 쓰고 싶은데, ‘겨우’는 이 날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자신이 쓴 글이라도 낡은 것은 버린다고 종종 이야기해왔다. 이번 소설집도 그랬나.

“써놓고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은 다시 손보지 않고 모두 버렸다.”

-책의 끝에 ‘작가의 말’이 아닌 ‘군말’을 썼다.

“그 글을 쓰기가 싫다는 심정의 표현이다. 써놓고 보니 역시 ‘군말’이다. 글을 쓴 자가 자신의 글에 대해서 다시 말하고, 그것을 자신의 책에 싣는다는 것은 남세스럽다. ‘군말’에서는 나의 글에 대해서 쓰지 않고, 글을 쓴 배경에 대해서 썼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이란 표현이 자주 나온다. 삶의 유한성을 강조한 것인가.

“좋지 않은 표현이다. 표현의 힘이 거덜나는 순간에 이처럼 두루뭉수리 같은 단어가 튀어나온다. 다시는 쓰지 않겠다.”

-‘손’ 과 ‘저녁 내기 장기’ 등 여러 편에 ‘개’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쓴 적도 있다.

“나는 개를 기르지 않는다. 개를 들여다보는 일이 괴롭다. 볼 때마다 개가 사람에게 순화되어온 수만 년의 세월이 떠오른다. 개는 개이기를 포기하면서 사람의 개가 되었다. 그런 괴로움이 자꾸만 글 속에 개를 끌어들이는 것 같다.”

-여러 작품에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은 경우가 있다. 시대와 세대를 달리하지만, ‘연결’ 같은 게 있나.

“이 질문을 받고 나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친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던 비밀을 들킨 것 같다. ‘이춘개’(명태와 고래)와 ‘이춘갑’(저녁 내기 장기)은 먼 인연이 있을 것 같다.”

이미지 크게보기 2020년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출간 당시의 김훈.

-‘저녁 내기 장기’에는 ‘아버님’이란 단어를 곱씹는다. 등장 인물은 “무인칭의 늙은이”를 부르는 말이라며 자조한다.

“병원이나 카페나 관청에 가면 젊은 직원들이 다들 늙은 나를 보고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이런 호칭은 이제 일반화되어 있다. 나는 이런 호칭을 들을 때마다 모욕감을 느낀다. 제발 이러지 말라. 내가 그 젊은이들을 향해서 아들아, 딸아, 사위야, 며느리야, 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노량진 고시촌을 그린 ‘영자’를 보면 시대의 젊은이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노량진 고시촌’이라는 동네에 여러 번 갔었다. 관찰과 취재만으로도 소설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 동네 젊은이들과 술 마시면서 많이 얘기했다. 한 해의 시험이 끝나면 다들 흩어져갔다. 1인당 소득 200달러 시대를 살아온 나의 청춘 시절보다 3만 달러 시대의 청춘들이 더 가엾고 오갈 데 없으니, 세상은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통해 무참한 현실을 목격한 기분이다. ‘군말’에서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기는 늘 어렵다”고 했다. 이때,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나.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현실에 바탕해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온 7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사회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꾸준히 개선해왔지만, 또 다른, 더 큰 문제들을 일으켜놓고 있다. 다들 ‘개혁’을 말하고 있지만, 개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오직 하나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