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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 새싹보리에게

3년째 코로나19에 갇혀 산다. 매스컴마다 생경한 단어들이 튀어나오고 밖에 나갈 때면 마스크부터 찾는 게 일상이다. 깜빡 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아차 마스크” 하며 튀어나오는 이 짜증스러운 일상, 스트레스다. 피할 방법이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어차피 닥친 현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던 중 새싹보리를 키워 보기로 했다. 다행히 시골 출신이라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먼저 양재동 꽃시장에서 직사각형 플라스틱 용기 세 개와 3단 거치대 그리고 화분용 흙을 구입하고 경동시장에서 겉보리를 샀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흙은 어느 정도 채워야 하며 겉보리는 어떻게 심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인터넷을 찾아보고 시골 출신의 영특한 감각을 살려 겉보리를 세 시간쯤 물에 불렸다. 그다음 플라스틱 용기에 양파망을 깔고 물을 뿌리며 흙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으로 불린 보리를 위에 뿌리고 흙과 버무리듯 휘저은 뒤 보리가 반쯤 흙에 박히게 꾹꾹 눌러 줬다. 그리고 온실효과를 주기 위해 랩으로 플라스틱 통을 덮었다. 비닐하우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습기가 뿌옇게 쌓인 랩을 열어 봤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뭔가 몸 비트는 시늉을 하는 듯했으나 변화는 없었다. 순간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기농 재배를 고집한 것에 대한 후회가 스쳤다.

이튿날 아침 다시 랩을 열어 봤다. 그 순간, “이게 뭐야?” 외마디가 나왔다. 신비로운 우주가 하얗게 열리고 있었다. 환희와 감동의 소나타가 작은 통 속에서 울려 퍼지고 가지런히 누운 작은 몸에서 아지랑이를 깨우는 클라리넷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하얀 나비의 날갯짓에 선율을 실었다. 누가 이 고요의 우주를 잠 깨우는가. 트럼펫이 천상의 체임버오케스트라를 지휘하자 객석에선 박수가 터졌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선율과 우아한 앙증은 인간의 작품이 아닌 신의 손길이었다. 흙에 반쯤 잠긴 수백 개의 작은 몸에서 병아리 눈곱 같은 하얀 싹들이 눈 틔움 하며 웃었다.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다시 랩을 열어 봤다. 어제 병아리 눈곱 같은 싹에서 하얀 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만 들여다보니 어떤 놈은 두 줄, 어떤 놈은 세 줄씩 잉태의 본능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엔 새싹으로 착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뿌리의 싹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뿌리를 먼저 내린 후 양분을 빨아들인 다음 새싹을 틔우는 이 작은 밀알의 경이에 머리가 숙어졌다.

4일째 되는 날 제법 파란 잎이 올라왔다. 그때 랩을 벗겼다. 이제 온실보다 바람이 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때부터 물을 충분히 줬다. 자라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쑥쑥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파란 잎 끝자락에 영롱한 물방울을 매달고 햇빛이 드는 각도에 따라 동글한 쪽빛 춤을 추고 있었다. 집 안에 파란 보리밭, 봄바람에 너울대는 너른 보리밭은 아니지만, 코로나19로 쌓인 스트레스를 달래주는 보리밭이었다. 6일째 되는 날엔 성질 급한 놈은 웃자라 옆으로 쓰러지고 키가 작은 놈은 땅땅한 근육의 몸통을 자랑했다. 심은 지 7일째가 되자 반 이상이 엽록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옆으로 쓰러질 듯 힘겨워했다. 어쩔 수 없는 수확의 시간이다. 도시 농부의 즐거움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7일간 새싹보리와의 여정은 코로나19를 잊는 푸른 여행으로 충분한 만족이다. 살짝 데친 토마토와 양배추 그리고 바나나, 아보카도, 딸기, 사과와 함께 만든 새싹보리 주스는 탁하게 엉킨 코로나19의 피로를 정화시켜 줬다.

처음 심어본 작은 우주여! 새싹보리여! 이제 너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반려의 싹’이라 부른다. 아침마다 너와의 눈빛 나눔은 사랑이요 행복이었다. 기다려라 너희들, 다음에는 더 많이 심어야겠다. 코로나19 덕분에 새로운 직업이 생긴 나는 오늘부터 새싹보리 큐레이터다.

시인 김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