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즈 주한 EU 대사가 지난 7일 서울 중구 한강대로에 위치한 EU 대표부에서 진행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제재와 한·EU 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 현안 인터뷰 -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즈 주한 EU 대사

무력으로 이웃나라 강제 진입
무고한 시민들 고통 야기시켜
법치주의와 폭력 간의 전면전

對러시아 제재 전회원국 노력
EU의 ‘에너지 믹스’ 다변화해
러시아 의존도 점점 벗어나야

韓·EU는 전략적 파트너 관계
韓 최대투자자는 美 아닌 EU
尹당선인 EU 관련 공약 없어

인터뷰 = 장서우 기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 평가받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77년. 전 세계가 주요 2개국(G2)인 미국·중국의 전략 경쟁에만 온통 관심을 쏟았지만, 정작 전쟁은 유럽에서 터졌다. 지난 2월 24일 이후 48일째 지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후 유럽의 사실상 첫 ‘열전(hot war·무력 전쟁)’으로, 군비 축소에 몰두하던 유럽의 안보지형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BBC 방송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안주하던 유럽을 충격에 빠트렸고, 이 대륙에 핵전쟁 가능성을 포함한 대량 학살과 파괴를 가져왔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 안보·정치 지형에 ‘신기원(era-defining)’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하며 거침없이 날을 세우고 있는 미국과 달리 유럽의 속내는 복잡하다.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 독일이 러시아와 에너지 문제로 깊숙이 얽혀 있는 데다, 푸틴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권위주의 성향의 국가수반들의 권력 기반도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유럽 대륙의 정치·경제 통합을 표방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리더십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다. 2020년 9월부터 한국에서 EU를 대표하고 있는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즈(59) 주한 EU 대사와 지난 7일 오후 서울 중구 주한 EU 대표부에서 만나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 유럽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새 정부가 출범한 한국과의 협력 방안 등에 관해 물었다.

―설마 했는데, 유럽에서 또 전쟁이 일어났다.

“단연코 2차 대전 후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가 연관돼 있다. 돈바스 지역이나 우크라이나, 유럽을 넘어 국제 질서 전체에 충격을 안겨 주는 전쟁이다. 러시아의 침공은 명확한 근거도 없을뿐더러, 정당하지 않고 불법적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위의 표현을 통해 이를 강력히 규탄했고, 러시아를 향해 침공을 중단하고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해 왔다. 한 국가가 무력을 사용해 이웃 국가에 강제로 진입하고, 무고한 시민들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존성이 확실히 보장돼야 하고, 이는 (러시아도 서명한) 헬싱키 협약에도 분명히 명시돼 있다. 우리는 규정과 질서에 입각한 세계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무력에 기반한 세계에서 살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선택 앞에 서 있다.”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화상 연설에서 국제사회의 무력함을 규탄하기도 했는데.

“다수의 결의안을 포함해 유엔은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해 어떠한 조건도 없이, 전 분야에 걸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앞장서 왔다. 최근 러시아가 유엔 인권이사회(UNHRC)에서 퇴출당한 것과 같이 우리는 계속해서 결속력을 다지고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 간의 전쟁이 아니다. 법치주의와 폭력, 이 2가지가 대결하는 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사태를 지시한 이들에 대한 국제 조사가 이뤄져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갈 것이다.”

―국제사회가 사태를 지시한 사람, 즉 푸틴 대통령을 직접 처벌하는 것이 가능한가.

“EU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파트너 국가와 함께 결속력 있는 방식으로 강력한 제재를 이행해 왔다. 일부 제재는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지만, 루블화 가치 하락에서 볼 수 있듯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푸틴 대통령이 책임을 지는 일이다. 그 과정은 국제적 기준에 맞게, 즉 법치주의와 규범에 입각한 질서를 토대로 관련 절차를 밟아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전쟁범죄를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ICJ)나 기타 인권 관련 국제 재판소에서 이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국민이 그를 심판할 수도 있다.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지만, 언젠가 진실이 전해지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1996∼2000년 EU 집행위원회에서 대(對)러시아 관계 담당관으로 일했던 이력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외교관으로서 한 국가의 지도자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EU 지도부의 평가를 전하자면, 푸틴 대통령이 제국주의 시대로 시계를 되돌려 놨다는 것이 전반적인 견해다. 이는 유엔 헌장이나 헬싱키 협약에 정면으로 반한다. 계약서나 법률에 서명해 놓고 이행하지 않는 건 국가 간에도, 기업 간에도, 또 개인 간에도 예의가 아니다. 푸틴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일주일 뒤에 다른 행동을 했다. EU 지도자들과 시민들은 푸틴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상실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대러 경제 의존도가 높은 일부 국가로 인해 단합된 제재가 어려운 상황이기도 한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일부 국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전 EU 회원국이 노력해야 한다. 회원국들은 각자의 에너지 믹스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있지만, 이는 원칙적으로 EU의 목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EU의 에너지 믹스를 다변화하고,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급원의 다양화로, 카타르·노르웨이·미국 등과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관련 협상이 이미 진행 중이다. 둘째는 에너지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 가스 관련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이는 시민들이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가능하다. 셋째는 (기존 에너지의) 대체원인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며, 이를 위해 인프라 확보, 투자 및 연구 등 정책적 차원의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 특히 이는 에너지 믹스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6% 정도로 상당히 낮은 한국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얼마 전 주제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고위대표가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귀머거리와의 대화 같았다”며 수위 높게 비난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EU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양자회담이 성사됐다는 건 최소한의 소통 채널은 열려 있다는 얘기이며, 기후 문제 등 주요한 세계적 의제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는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국은 중립적인 것 같으면서도 러시아를 전혀 규탄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 측이 주장하는 (침공의) 명분을 진짜로 믿고 있는 듯하다. 제재와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외교적 노력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차원에서 EU는 중국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지만, 중국은 그럴 의향이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EU가 중시하는 인권 문제에 관해서도 다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세계 대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는 유엔 합의 사항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 같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대한 견해는.

“우크라이나는 한국처럼 주권 국가로,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EU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원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월 28일) EU 가입 의향서를 제출했고, 이에 대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우크라이나는 유럽 가족의 일원’이라고 화답해 관련 절차는 이미 개시됐다. 의향서에 대한 일차적 평가가 이뤄지고 나면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협상은 EU 내 여러 기준과 규범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에 대한 EU 시민들의 환대는 놀랍다.

“국경에서 불과 20∼30㎞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안팎으로 강한 연대감이 형성됐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전부터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인접한 나라뿐 아니라 스페인 등 멀리 떨어진 EU 회원국과 상당한 인적 교류를 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피란처부터 학교, 병원, 의료 시설까지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탄탄하게 구축된 상태였다. 사실 이 같은 EU의 연대감은 전 세계를 향해 왔다. 남미나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제공되는 공적개발원조(ODA)의 46%가 EU에서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는 개인적으로 만났나. 새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은 EU와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맺는 전략적 파트너 국가다. 한국의 최대 투자자는 미국이 아닌 EU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윤 당선인 공약에는 EU 관련 언급이 전혀 없었다. 취임 이후부터는 EU 관련 의제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윤 당선인은 다자 체제나 민주적 가치를 중요시한다고 전해 들었고, 세계 무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안보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녹색 전환, 디지털 전환 등 여러 국제적 이슈에서 EU와 같은 편에 서서 책임을 함께 나누고,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노력하고 싶다. (미국과 같이) EU에도 특사나 대표단이 파견되기를 당연히 희망하며, 취임 전에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