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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해바라기 씨 품은 채 죽을 것”
러 군인에게 말한 우크라 여성

남성 아닌 여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혹함 그린 두 작가

포탄 속에서도 희망의 힘과
언어의 힘을 믿었던 사람들

우크라이나에서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진격한 군대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폭격했고,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도 점령되었고, 돈바스를 비롯한 수십 곳에서 지상전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조짐에 예민해진 러시아가 무력 침공을 한 데 대해 세계의 비판 여론이 뜨겁다. 전시지역을 벗어나려는 피란민의 행렬을 보며, 강대국들 사이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운명에 자꾸 우리나라 상황을 대입해 보게 된다.

너무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기사를 자주 찾아보게 되는데, 아조프해 연안 도시인 헤니체스크에서 촬영된 한 영상이 눈길을 끌었다.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총을 들고 있는 러시아 군인을 향해 “당신들은 불법 점거자들이고 파시스트들이오. 이 많은 총을 들고 우리나라에서 뭐하는 거요”라고 묻는다. 러시아 군인은 상황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듯 그냥 지나가라고 하지만, 그 여성은 더 흥분해서 “무슨 상황? 이봐요, 당신 바지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나 넣어 두시오. 당신은 그 씨를 품은 채 죽을 것이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우크라이나 국화인 해바라기의 씨를 품은 채 당신은 이 땅에서 죽을 거라는 저주의 말이다. 그 여성은 손자뻘 되는 적군 병사를 보며 그 청년이 무서운 침략자라기보다는 훈계해서 돌려보낼 수 있는 동류의 인간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항변이 아니다.

그 여성의 행동을 보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이 책은 전쟁에 참전하거나 전쟁을 목격한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작가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것은, 몇 대에 걸쳐 전쟁으로 얼룩진 가족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전쟁에 대해 들어온 것은 주로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 모두 알지 못하는 여자들의 전쟁’을 알리려 했다. 취재를 다니는 동안 알렉시예비치는 참혹하고 불편한 진실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남성 영웅의 극적인 무용담이 아니라,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과 아이와 땅과 새와 나무들의 이야기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원전의 재앙을 세계에 알렸던 알렉시예비치는 ‘아연 소년들’에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폭력성을 증언하기도 했다. 작가는, 소비에트의 영웅적인 전사들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소년병들과 그 어머니들의 고통에 주목했다는 이유로 출판의 어려움을 겪었다. 책이 출간된 후에는 참전군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번에도 그의 조국 벨라루스가 러시아의 혈맹국으로서 우크라이나 침공에 곧 합류할 전망이라는 소식에 착잡하기만 하다.

전쟁을 다룬 또 한 명의 여성작가가 있다. 루마니아 출신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타 뮐러는 나치 군인으로 러시아에 갔던 아버지와 그 죄로 인해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에서 노역해야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부모로 둔 그가 겪었을 분열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유년기의 경험을 들려주는 ‘저지대’에는 전쟁과 독재 권력에 의해 내몰리고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적인 문체로 펼쳐진다.

뮐러는 소련군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5년간 노역했던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술을 받아 적어 ‘숨그네’라는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 수용소의 상황을 취재하는 동안 작가는 현장의 처참함을 보며 자신의 가족사를 동시에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뮐러는 이러한 비극이야말로 시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그것이 곧 문학의 명예라고 생각했다. “국가가, 비밀경찰이 내게서 차압할 수 없는 유일한 것, 그것이 언어”라는 걸 뮐러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는 언어 속에 잠재해 있는 생명의 힘을 끝까지 믿었다.

여성작가와 남성작가가 전쟁을 다루는 방식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 두 여성작가는 무고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되묻는다. 그 질문의 칼끝이 탐욕과 오만으로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을 향해 있음은 물론이다. 현재의 정치적 역학 구도로 보면, 주변국인 벨라루스와 루마니아는 러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러나 만일 알렉시예비치와 뮐러가 만나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말한다면 두 작가는 목소리를 모아 이 어리석은 폭력을 당장 멈추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우크라이나 여성에게로 돌아가 보자. 침략자인 러시아 군인에게 해바라기 씨를 주머니에 넣고 죽을 것이라는 말이 과연 저주에만 그치는 것일까. 그가 정말 원한 것은 적군의 죽음이 아니라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전과 다름없이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세상을 꿈꾸며, 알렉시예비치나 뮐러처럼 포탄 속에서도 평화의 힘을, 언어의 힘을 믿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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