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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작가

아이 실수로 사람이 다쳤는데
부모는 자식 감싸고 책임 미뤄

피해자 주변선 병원 입원 강요
보상받아 손해 만회하라 독촉

이익 취하려고 분쟁만 부채질
서로 헤아리던 마음 어디 갔나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그 친구는 혹독하고도 지난했던 습작 시절을 함께 통과해 온 여성 문우로, 모든 면에서 나보다 더 너볏하고 품이 넓다.

한때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단어가 유행했었는데. 그 배경에는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수필이 있었다. 지란지교가 되기까지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존중이 필요할 터인데, 감사하게도 그 친구는 나에게 묵은 술맛 같은 지란지교인 셈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내 사정과 속내를 읽어 내는 타인이라니. 얼마나 놀랍고 멋진 일인가.

생각해 보면, 그 친구와 여행도 많이 다녔고, 내밀한 사정도 조심스럽게 나누어 가졌다. 그 시간들의 두께가 쌓이고 쌓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 갔는데, 대체로 그가 나보다 더 이해의 폭이 크고 넓었다.

나는 내 생의 숱한 아침 가운데 어느 날의 아침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가족들로부터 독립해 혼자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당혹스러웠고, 그 당혹스러움은 깊은 우울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좀처럼 울리지 않던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다.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 이른 시각에. 나는 누군가 집을 잘못 찾아왔거나 포교를 위해 나온 어느 종교단체 사람들인가 싶어 기척을 줄이며 조용히 물러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초인종은 마치 내가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멈추지 않았고, 또 계속해서 울릴 기세였다.

마지 못해 문을 여니 뜻밖에도 문밖에 그가 서 있었다. 양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서 있던 그는 힘이 들었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왜 문을 늦게 열어? 무거워 죽는 줄 알았구만. 그는 늦게 문을 연 나를 타박하며 대뜸 나를 밀쳐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싱크대에 물건들을 부려 놓는 그 친구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며 이게 다 뭐냐고 물었다.

오늘이 생일이잖아!

생일이라니? 나는 그날이 내 생일인 줄도 몰랐다. 알았더라도 특별히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히 무심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그 친구는 혼자 있을 나를 떠올리며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일 요량으로 이것저것 싸 들고 온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 그 친구와 만날 기회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전화 통화를 할 때면 그간의 적조했던 시간들이 무색하리만큼 편안하며 흔연스러웠다.

그런데 여느 때 같지 않게 그날의 통화는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친구의 그 너른 품성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리는 듯싶어 마음이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전화 속에서 그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넘어져 안와골을 심하게 부딪쳤는데 그 때문에 너구리 같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버스 안에서 한 아이가 그의 치맛자락을 밟았던 모양이다. 나는 너구리처럼 한쪽 얼굴에 멍이 든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지만, 그 웃음이 민망하게도 정도가 심해 병원에 가서 시티(CT)까지 찍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음화상으로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했다.

한데, 그의 치마를 밟은 아이의 부모 대응이 미욱했다.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가 입었을 부상을 함께 걱정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이의 부모는 오히려 친구의 부주의를 탓하며 아이가 입었을 심리적 타격을 더 염려했다고 했다.

아이의 부모도 부모였지만 정작 친구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주변의 반응이었다.

친구의 얼굴을 본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해 버린 친구의 행동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나무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병원에 입원해 손해를 만회하라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 충고와 타박들이 하도 진지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 친구는 고백했다. 이해와 관용보다는 갈등과 분쟁을 부추기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조금도 물러서지 말라며 등 떠미는 각박한 인심이라니…. 하긴 누군가는 그 분쟁과 소송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으니, 무조건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라는 말도 조심스럽긴 하다.

어쨌거나, 친구의 치마를 밟은 그 아이는 부모에게서 자신의 실수에 대한 미안함과 사과보다는 타인의 부주의함에 대한 공격부터 배웠을 것이다. 아이는 그 기억을 교훈과 잣대 삼아 자신을 보호하며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는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남없이 서로의 어려운 형편을 헤아리며 살아 온 그 넉넉한 마음에 있었는데. 그 마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들이 있다. 너무 많은 갈등이 존재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타인의 형편을 헤아리고 배려하던 그때의 그 가치들이지 않을까. 새삼 그 친구가 고맙고, 친구의 마음이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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