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헌법학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70여 년 역사에 중대한 변곡점이 여러 번 있었다. 1948년 헌법 제정과 정부수립도 그렇고, 6·25전쟁도 그렇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한정해서 본다면, 1960년 3·15부정선거와 이에 분노한 국민이 궐기한 4·19혁명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을 통해 국민이 주권자로서 뚜렷한 자각을 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첫 단추인 선거의 의미와 중요성을 확인하고, 부정선거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4·19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베이스캠프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후 선거관리위원회가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설치됐고, 공직선거법을 통해 선거부정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제도화됐다.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대통령 5년 단임제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출마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및 영향력이 선거에 투입될 경우 관권선거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클 뿐 아니라, 장기집권과 독재화의 경험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그래서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도입한 것이다.

실제 그 효과는 작지 않아서,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남에 따라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해졌고, 민주주의의 기초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기 위해 공직선거법 제9조는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선거 중립 의무가 대통령에게도 적용됨을 확인한 바 있다.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부정선거 우려를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 총선에 대해 부정선거 의혹이 매우 강하게 제기됐을 뿐 아니라, 조해주 선관위 상임위원의 사표 반려와 관련해 연임설이 나오자 선관위의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일파만파였던 것도 국민이 선거의 공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 문제된 사건도 공권력을 동원한 관권선거의 시도가 아니라,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던 중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한 것이었고, 미국의 대통령처럼 적극적인 선거유세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 국민은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헌재의 결정에 공감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3·15부정선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과거의 진흙탕 선거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는 국민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대통령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하며, 대통령의 선거 중립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비록 대통령이 심정적으로는 여당 후보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 문제 될 뿐만 아니라, 국민의 표심(票心)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미칠 것이다. 더욱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권력의 행사 또는 동원이 있는 경우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금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가 강조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