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작가들, 60×40㎝, 색지에 파스텔,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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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더블린 작가 박물관(下)

1970~1980년대 같은 전시관
100년 넘은 타자기와 소품들
낡은 카펫과 비좁은 공간 사이
두서없이 작가 초상과 책 배치
대접 받지 못한다 생각에 씁쓸

그래도 어둠 속 떠 있는 달처럼
‘문학은 이곳에 이렇게 있구나’
안도감 몰려와 묘한 감정 솟아

숲의 사람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말했다지 않는가. 진실을 말할 때 두 사람이면 족하다고. 말하는 한 사람과 듣는 또 한 사람이면 된다고. 박물관의 오래된 원고지와 잉크 자국 희미한 글씨들 사이에 서서 맑게 흐르는 한 줄기 바람을 본다.

철학이 침묵의 소산이라면 문학은 이야기와 서사다. 아일랜드 문학 박물관은 하프연주와 함께 불리던 옛 음유시인의 이야기들로부터 시작된다. 그 땅의 역사 자체가 문학의 샘이고 근원이라는 이야기다. 가톨릭 국가답게 영국과의 갈등은 가톨릭과 성공회의 종교적 갈등과도 얽혀 있다. 아일랜드어로 번역된 오래된 성경도 탁자에 놓여 있다.

아, 그 탁자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초판본의 파란색 책 표지가 보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청(문학청년) 시절에 나를 기죽였던 책. 지금까지도 완독하지 못한 책. 그런데도 마치 다 읽은 듯한 느낌이 들곤 했던 바로 그 책. 방대하고 세밀하며 대하처럼 한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라니. 소설 아닌 장설(長說). 그 문학 영웅을 그러나 노벨상은 에둘러 피해 가버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상(賞)이란 마치 파블로 네루다가 쓴 것처럼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일 뿐. 상은 상이고 문학은 문학이다. 그래서였을까, 사뮈엘 베케트도 장 폴 사르트르도 노벨문학상 소식에 시큰둥해 했다. 베케트는 시상식에 가지 않았고 사르트르는 아예 수상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우리가 그토록 학수고대해 마지않는 상을 말이다.

작가 박물관에는 소위 아일랜드 문학 5인방을 중심으로 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친필 원고며 빛바랜 사진, 편지, 일기 등이 산만하고 어지럽게 전시돼 있다.

문 열고 들어서면 100년이 넘었다는 타자기며, 음유시인들의 원고, 그리고 손때 묻은 소품들이 보인다. 벽에 걸린 작가들의 초상화를 보며 2층으로 가면 근대 여류시인들의 책과 소품, 오래된 가구가 보이고 문학 강연장 비슷한 공간도 있다. 낡은 카펫과 낡은 액자, 집기들의 늙은 방은 “알겠지? 문학은 가난이야. 예나 이제나 ‘가난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다. 그냥 한 문학 호사가의 집에 초대돼온 느낌이다.

방들은 물론이고 후원으로 나가는 벽이며 심지어 화장실 가는 쪽까지 무질서하게 사진, 인쇄물, 포스터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어서 그야말로 책과 자료의 곳간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이곳에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다. 세 벽이 천장까지 헌책들로 쌓여 있던 나의 옛 방으로 되돌아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둘러보니 살짝 1970, 1980년대 전시관 스타일에 서운한 느낌도 들었다. 문학은 이래도 된다는 것인가 하는 서운함이다. 전시가 좀 더 맵시 있고 세련될 수는 없었던 것인지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물론 문학은 아직도 이곳에 이렇게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도 교차하며 자못 심리가 복잡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언젠가 도쿄(東京) 메구로(目黑)의 일본 근대문학관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 웅장한 건물에서는 (30년이 지난 3년 전에 다시 갔을 때는 적당히 낡은 모습이었지만)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문학주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마치 배우나 영화감독의 행사처럼 그의 문학적 일대기가 영상 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는 반대로 문학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어쨌거나 이곳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꼭 가보고 싶은 로망이 있는 곳인데 너무 두서없고 산만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벽에 걸린 작가 초상이나 사진이며 책, 원고들이 비좁은 공간 탓에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하늘의 별 같은 작가들이 이곳에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작가 알베르 카뮈의 묘비가 있는 알제리 근교 바닷가 티파사를 찾아갔을 때도 비슷한 소회였다.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 카뮈의 그 생가 역시 초라함을 넘어 거의 방치됐다는 느낌이 들 만큼 안내 표지판 하나 없었다. 물론 알제리는 국가 체제상 카뮈의 문학을 퇴폐적이고 소모적인 자본주의의 산물 정도로 생각했을 개연성도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곳을 오게 돼 후련한 느낌이다. 그 낡은 문학의 집 어두컴컴한 실내를 나와 문을 나서니 밖에는 환한 햇빛이 비친다. 밖은 현재고 안은 과거인데 두 세계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셈. 저만큼 가다 말고 그 오래된 붉은 벽돌집을 다시 뒤돌아본다. 얼핏 살아생전 이곳을 다시 오게 되진 못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스친다. 같은 듯 다른 세상. 지금 이 거리는 햇빛으로 부서지는데 저 안에서는 문학이라는 창백한 낮달이 떠올라 있으리라. 어둠 속에서도 지지 않는 달이.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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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린 문학 박물관의 두 주역

노벨상 못 받아도 큰 사랑받는
제임스 조이스·오스카 와일드

저 나름대로 그곳에서의 두 주역을 골라낸다면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카 와일드다. 문학의 숲 아일랜드의 별 같은 작가들 속에서도 두 사람은 단연 돋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대중적, 문학적 지명도에서 온 아우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노벨상을 받진 못했지만, 그 상과 관계없이 오랫동안 많은 문학 애호가의 사랑을 받아왔다. 우리는 세계 문학이라고 하면 노벨상부터 떠올리고, 한국 문학으로 그 상을 받을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지만 정작 아일랜드인은 수상 여부로 작가를 재단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전시에서도 수상자를 특별히 조명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상을 받지 못한 조이스 같은 작가에게 공간을 더 할애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은 상, 문학은 문학이라는 쿨한 태도. 노벨문학상 콤플렉스를 지닌 우리로서는 돌아볼 만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