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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던스 ‘사랑한 후에’

‘좋은 거 다 걸치고 제아무리 폼을 내어도/ 벗고 나면 다 똑같은 모습일 뿐이야’ YB(윤도현 밴드) 2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제목(‘가리지 좀 마’)만 봤을 땐 일조권이나 조망권을 주장하나 했는데 들어보니 진실을 가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런 시리즈(‘그러지 좀 마’)가 몇 곡 더 나와도 괜찮을성싶다. 모음 하나만 바꿔서 ‘가르지 좀 마’는 어떤가. 출신 따져가며 이쪽저쪽으로 가르는 거 좋아할 사람 흔치 않다. 거기에 한 글자 더 붙이면(‘가르치지 좀 마’) 이른바 ‘꼰대라떼’가 들어야 할 노래가 된다.

내가 급조한 우화다. 숟가락이 말한다. “어디서 오셨는지 인사들 나누시죠.” 배추가 입을 연다. “저는 태백에서 왔어요.” 고추도 말한다. “청양이 고향입니다.” 멸치도 끼어든다. “통영 앞바다 가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쌀이 한마디 한다. “여주 날씨가 기가 막히죠.” 젓가락이 정리를 한다. “출신이 어디건 여기서 만난 거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이미지 크게보기 주철환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지금부턴 식탁이 아니라 무대 위의 실화다. 어제(6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출신이 다른 네 청년의 앙상블이 펼쳐졌다. 국악과 출신의 소리꾼(고영열), 외국대학 출신의 테너(존노), 성악과 출신의 베이스(김바울), 연극학과 출신의 바리톤(황건하)이 그들이다. 2021년 6월 기준 27.5세인 그들은 어떻게 한자리에 모였을까. 음악은 친구를 만들어준다. ‘팬텀싱어’(JTBC) 덕분에 그들은 ‘라비던스’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그들에겐 미치도록(rabid) 대중을 안내(guidance)하고픈 음악세계가 있었던 거다.

장르가 서로 다른 형식을 혼합해 만든 음악을 크로스오버라 부른다. 오늘 음악동네에선 라비던스가 경연(‘팬텀싱어3’) 최종결승 1라운드에서 부른 ‘사랑한 후에’를 소개한다. 들국화의 전인권이 호소력 짙게 부른 노래로 유명하지만 원곡(1978)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수 앨 스튜어트(Al Stewart)의 ‘베르사유 궁전’(The Palace of Versailles)이다. 앨런 파슨스(Alan Parsons)가 프로듀싱한 곡으로 멜로디는 16세기 작곡가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의 ‘솔즈베리 백작’(The Earl Of Salisbury)에서 따왔다. 이렇게 장황하게 명단을 나열하는 건 솔즈베리에서 라비던스까지의 기나긴 음악 여정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원곡의 가사는 마치 혁명의 전주곡 같다. ‘바스티유 벽 위로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고/ 파리의 거리에선 믿기 힘든 기운이 감돈다’(The wands of smoke are rising the walls of the Bastille/ And through the streets of Paris runs a sense of the unreal). 이 장엄한 서사를 전인권은 소년의 가슴으로 쓸어 담았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그러나 시간이 움직이면서 어두웠던 마음의 방향도 새날을 향한다.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새벽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선곡의 배경을 유학파 존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등학교에서 동양인이 저 혼자였거든요. 그때는 그다음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고 외로울 때 이 ‘사랑한 후에’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거든요.” 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진 건 거대한 베르사유 궁전이나 바스티유 감옥이 아니라 작은 새 한 마리와 새벽 종소리였다.

어떤 노래는 나무를 닮았고 어떤 노래는 바람을 닮았다. 어떤 노래는 비가 돼 내리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음악은 음식이다. 밥 먹을 때마다 감사하다면 하루에 세 번은 감사한 거다. 감사히 부르고 감사히 들을 때 음악동네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