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 집안에 둘째 며느리로 시집와 살림 도맡아온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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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 한영자님

노르스름한 감꽃 위에 금빛 미소를 머금은 초여름의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날. 생의 길목에서 인연의 고리로 묶인 아름다운 사람, 내가 단발머리 소녀 시절 그녀는 내 앞에 처음 나타났다. 시댁에 들어와 산다는 건, 어쩌면 낯선 땅에 처음 부임한 선생님이거나 선교사 같은 게 아닐까?

그녀는 남편을 빼고도 여섯 식구의 시선을 늘 의식하며 자기가 뽑은 심지에 책임을 지고자 노심초사했다. 밤낮없는 집안일에 밥을 해도 그냥 밥만 하는 게 아니다. 밥 위에 호박이나 가지를 얹기도 하고 밀가루 옷을 입힌 고추를 얹기도 한다. 어느 땐 새우젓 국을 푼 달걀을 얹어 별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또 타이밍을 잘 맞추지 않으면 밥이 설거나, 밥 위에 얹은 것들이 설거나 했다. 정말 그런 것들이 내게는 예술처럼 보였다. 그저 잘 얻은 둘째 며느리, 잘 들어온 올케, 제수로 만족하며 그렇게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새벽이면 논밭으로 나가시던 어머니를 대신해 내게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고 뒷바라지해 주던 여인. 여고를 졸업하던 해 공무원이 돼 초임발령을 받을 때 함께 기뻐해 주던 박꽃 같던 여인.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낮에 있었던 민원인과의 마찰로 울분을 토해내면 “나랏돈 받는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느냐, 그저 참으라”고 달래주던 여인. 세월은 흐르고 나도 같은 직장에서 인연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가까운 곳에 신접살림을 차리다 보니 연년생으로 낳은 우리 아이들까지 돌봐주는 외숙모가 됐다.

종일 엄마 없이 보내는 어린것들 데려다 먹을 것 챙겨주고, 비 오면 아이들 학교로 우산도 가져다주고, 늘 부족한 모성으로서의 죄책감에 콧날이 찡하던 내게 안식을 주곤 했던 여인. 무엇보다 새로운 음식의 맛과 옛맛을 기억하며 그대로 재현해내는 음식 솜씨가 으뜸인 여인. 두부와 북어를 굽고 삼계탕을 제대로 해 먹여 어느 것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던 우리 아이들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외가댁이란 말보다 더 따사롭고 정겨운 어휘도 드물 것이다. 외갓집 하면 왠지 꿈이나 동화 세상을 연상시켜 주는 것 같다. 평화스럽고 인정스럽기 그지없는 감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준 그 여인이 사는 내 아이들의 외가는 별세계였고, 꿈의 공간이었으리. 언제나 감성의 탄력을 키워주고 인격의 토양을 풍요롭게 하는 유년기의 꿈나라가 아니었을까.

어느덧 이젠 나도 정년퇴직을 하고 60이 넘었다. 봄엔 딸인 나도 기억을 못 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백 세 되는 해라고 산소 앞에다 온갖 산해진미로 생신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우리 형제를 모두 불러 모아준 여인.

아아, 비록 주름살이 물결처럼 드리워지고 검버섯이 돋아나고 마른 수풀같이 엉클어진 흰머리를 이고 있는 저 여인이지만 내 눈엔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명색이 작가라고 내게 어머니를 향한 편지를 써와 읽으라고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눈물, 콧물 범벅이 돼가며 읽었던, 슬프고도 기뻤던 기억이 꿈길처럼 아련히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엄마! 산소를 돌보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작은 오빠와 올케가 6년 전에도 아버지 백 세 생신제를 준비해서 지냈는데, 그때만 해도 건강하던 작은 올케가 지금은 70이 넘어 아픈 데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성치 않은 몸으로 정성을 다해 차려드린 생신상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천상에서나마 우리 8남매와 자손들 모두가 무탈하게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의 크신 공덕을 베풀어 주세요.”

박경희(진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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