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게티이미지뱅크

■ 고통 없는 사회 |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김영사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인 고통
근대부터 시작된 ‘성과사회’가
사회문제 아닌 사적인 문제化
정치·예술 영역서도 부작용 커
팬데믹 시대 이르러 고립 심화

이미지 크게보기

“오늘날 어디서나 고통공포, 즉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가 회피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고통 없는 사회’에서 지금, 이곳을 ‘진통사회’라고 규정한다. 진통제로 잠시 고통을 잊는 환자처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경고등’인 고통을 삶에서 추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6∼2017년 마약성 진통제의 오남용으로 수만 명이 죽은 미국 오피오이드 사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성과사회의 자기착취를 폭로한 ‘피로사회’, 전체주의화의 위험성을 꼬집은 ‘투명사회’ 등으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지성계에 반향을 일으킨 저자가 이번엔 ‘고통’과 ‘좋은 삶’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등의 키워드로 니체·베냐민·푸코·아도르노 등의 철학을 살피며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상실한 현대인을 성찰한다.

책은 ‘모든 부정적 생각은 긍정적 생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긍정 심리학의 지배로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인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한 데이트 포털의 문구처럼 현대사회에선 사랑의 고통조차 회피되고, 소셜미디어에서 남발되는 ‘좋아요(like)’는 어느새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징표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고통 회피 성향은 ‘성과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근대 사회에선 정치권력이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을 통해 지배 헤게모니를 유지했으나 근대로 넘어오며 고문은 ‘규율’로 대체됐다. 처벌 대신 규율을 통한 통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을 만들어낸 ‘규율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이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사회’로 이동했다. 성과사회에서 ‘스마트한 권력’은 고통이 아닌 ‘행복하라’는 새로운 지배 공식으로 시민을 통제한다. 문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사회 현안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분노를 잠재우고 자신의 심리에만 몰두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고통이 사적인 문제로 치환되며 “개선돼야 할 것은 사회가 아니라 영혼”으로 바뀐다.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는 고통의 원인이 오직 개인에게 귀속되는 성과사회의 필연적 귀결이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연대 상실과 고립을 심화하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이 제1 명제가 되면서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가치는 기꺼이 희생된다.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한 서사가 사라진 진통사회는 곧 ‘생존사회’인 동시에, “죽기엔 너무 살아 있고, 살기엔 너무 죽어 있는” 좀비사회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건강·피트니스 앱이 드러내는 ‘디지털 건강염려증’과 ‘생존 히스테리’는 삶을 하나의 기능으로 격하시킨다.”

고통이 의학적 문제로만 치부되는 생존사회에서 ‘이웃사랑’은 ‘이웃에 대한 거리두기’로 변모하고, 팬데믹을 기점으로 강화된 생명정치적 감시 자본주의는 데이터 수집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는 ‘자유주의의 종말’로 이어진다.

저자는 진통·생존사회가 정치와 예술 영역에서도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분석한다. 우선 ‘막연한 중도’가 진통 작용을 하는 정치 영역에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서라도 달성해야 할 개혁을 이끄는 ‘갈등’과 ‘논쟁’이 설 자리를 잃어간다. 저자는 철학자 샹탈 무페의 입을 빌려 진통지대에서 활력을 상실한 ‘탈민주주의’를 극복하려면 “고통스러운 대결을 피하지 않는 ‘경합적 정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한다. 문화와 상업, 예술과 소비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 역시 진통사회의 단면이다. 최대 다수의 만족을 지향하는 현대 예술은 과거처럼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란하거나 당혹스러운 고통을 안기는 대신 ‘동일한 것의 변주’만 일삼는다. 영화·게임 등 대중문화의 ‘폭력적 포르노’는 살인조차 고통 없는 사건으로 묘사하며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한편으로 저자는 고통이 사라진 듯 보이는 ‘만성마취’의 사회에서 더 큰 자극을 갈구하는 극단주의자들, 자신의 몸에 일부러 낸 상처를 SNS에 올리는 파괴적 나르시시즘은 진통사회의 또 다른 역설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병철의 전작들처럼 정치·사회적 의제를 시적인 문체로 짚어나가는 이 책은 빽빽한 ‘정보’를 전하기보다 행간의 숨은 공백에서 독자 스스로 사유하게 한다.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미래’를 확신하는 트랜스 휴머니즘에 근심을 표하는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국의 지역적 특수성을 생각하면 다소 복잡한 심경이 든다. 행복지수는 바닥권이고,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한국을 ‘고통 없는 사회’라 부르기 망설여지는 까닭이다. 고통을 체감하고 고통에 대한 강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역설적으로 한국은 여전히 희망이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진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이전에 맺은 결속이 진실했음을 입증하는 것은 ‘결별의 고통’”이므로. 112쪽, 1만28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