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문구는 내가 쓴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허블)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강연에서 종종 이 구절을 인용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현재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는 않은 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다면 ‘정상 속도’라 규정된 이 속도는 누가 만드는 것이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누가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해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는지도 말할 수밖에 없다. 내 강연의 청강자는 대부분이 10대여서, 그들은 내 소설 속 휠체어를 타고 있는 ‘은혜’라는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강연을 듣고 질문한다.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듯이. 자신은 이 속도에서 밀려날 리가 없다는 듯이. 그런 확고한 생각이 깃든 표정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속도에서 밀려나게 된다”고. 그들은 영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내가 내뱉은 단어 한 마디에 곧바로 수긍한다. 바로 ‘노인’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필수불가결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느려지고, 흐려지고,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으로 속도를 늦출지언정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이다. 느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무리 없게 건너는 건널목 신호가 밭게 느껴지며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고, 흐려진다는 것은 스마트폰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멀어진다는 것은 TV 소리가 희미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특징들은 흔히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장애인의 특징이라 여기지만, 그 특징은 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 그런 특징들이 신체 노화와 함께 발현된다.

노인이 살 수 없는 행성. 인구가 너무 많아져 노인까지 배려해줄 수 없는 행성. 그래서 노인을 행성 바깥으로 보내기로 한 사회. ‘정상 청년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으로 내몰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런 사회를 과학소설(SF)로 보여준 작품이 있다.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허블)에 실린 오정연의 단편 ‘남십자자리’다.

남십자자리의 가장 밝은 별 아크룩스로부터 1.78광년 떨어진 CR8983베타 행성계의 제 5행성에서, 평균 연령이 114세인 1억2000만여 명의 거주민과 1063만여 구의 휴머노이드가 유사 일상을 영위하며 사는 이곳은 바로 ‘양로행성’이다. 가짜 직업을 가진 노인들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와 함께 살며 노인들은 지구에서 영위하지 못했던 일상을 산다. 마치 일자리를 잃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노인들을 위해 행성 하나를 테라포밍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래 봤자, 대면하고 싶지 않은 예정된 미래를 멀리멀리 보내 버리겠다는 거잖아. 대단하지 않냐? 인간이 인간이지 않은 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을 지속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한 우주적 규모의 실험. 저건 대처가 아닌 방관이지.”

나는 언젠가 정말로 양로행성이 만들어질까 무섭다. 그렇게 된다면 지구는 결국 한 시절 잠깐 머물다 가는 행성이 될 테니까.

소설가

이미지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