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계절출판사 제공

■ ‘막내의 뜰’ 펴낸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열한살까지 이사했던집 일곱채
풍경·추억 50여점 그림에 담아
‘막내’ 시선으로 1960년대 회고

어릴적 집·가족·강아지·개울…
내 생에 대한 낙관·의지 키워줘
“나만의 뜰, 다들 꼭 그려보시길”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24일 파주 사계절출판사에서 만난 강맑실 대표. “여름에 해수욕을 해야 겨울까지 감기에 안 걸리고 잘 지낸다고 하시던 모습이 생생해요.” 해변에 선 아버지 그림을 보며 강 대표는 환하게 웃었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 때까지 살았던 집의 평면도(맨 위)와 막내(맨 왼쪽)의 모습.

아파트 숲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유년은 어떤 색일까. 세련된 외관의 아파트가 많지만 그렇다 해도 태생적인 한계, 그러니까 희뿌연 회색빛을 감추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높고 거대한 ‘시멘트 산’은 기억을 집어삼킨다. 2.3m짜리 균일 층고를 축으로 그저 집이 좀 넓어지거나 좁아졌거나 하는 식의 ‘쭉정이’ 기억만 남을지도.

“우리 애들한테 물어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아파트에 살 때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이사를 두 번밖에 안 했는데 장소와 시간이 마구 뒤섞여 있기도 했고. 뭐,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 똑같이 생겼으니까….”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는 자녀들의 대답에 서울살이를 접고 강화도에 집을 지어 이주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왜 강화도였을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과 가장 비슷한 정취를 풍겼거든요.” 강 대표는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열한 살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그런데도 그 풍경과 추억이 선명하다. 못 믿겠으면 그가 직접 쓰고 그린 책 ‘막내의 뜰’(사계절)을 보면 된다. 아빠의 서재, 할머니 방, 벽장과 툇마루 등 보고 그린 듯 정밀한 일곱 채 집의 평면도, 여기에 고라니 밤비, 강아지 복실이, 아궁이와 우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 집 앞 개울, 눈 돌리는 곳마다 반짝이던 나무들까지…. 따사롭고 청량한 강 대표의 유년시절이 50여 점의 수채화와 40편의 글로 되살아났다. 책이 막 나온 지난 24일 경기 파주 사계절출판사 본사에서 강 대표를 만났다.

“5년이나 묵혔어요.” 40여 년 편집자로 살아온 출판인이지만 자신의 책을 내는 건 어쩐지 부끄러웠다. 책장에서 평면도 스케치를 꺼내며 강 대표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 해수욕하는 모습은 꼭 싣고 싶었는데…”라며 편집과정에서 탈락(?)한 그림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는 일곱 형제 중 막내다. 책은 이 ‘막내’의 시선으로 천진하게, 담담하게 1960년대를 회고한다. 중심엔 ‘집’이 있고, 사람이 있고, 마음이 있다. 학교 관사, 적산 가옥, 한옥 등 어린 시절 살던 집과 주변 경치, 친구가 돼 준 자연, 막내를 귀여워하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 그리고 기쁨, 슬픔, 즐거움, 섭섭함 등 막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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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대표는 “가장 먼저 평면도부터 그렸는데, 집 구조를 보니 그때 그 시절이 더 생생해졌다”고 했다. 평면도는 큰 기억의 줄기였고, 이를 따라 추억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잎을 붙이니 이야기가 완성됐다. 동화의 형식을 빌린 자전적 에세이다.

이 과정에 세 언니와 세 오빠의 역할이 컸는데, 책이 나오기 전 단톡방에서 ‘심의’를 받았다. 지적 대신 이어진 건 뜻밖의 사과. “어릴 때 많이 못 놀아줘서 미안해.” 책에 “막내를 다들 귀여워만 하지 놀아주지는 않는다”며 외로워했던 어린 강 대표의 마음이 드러난 대목이 있어서다. 목욕하며 엄마에게 혼나던 오빠들, 닭죽을 먹을 때 하던 놀이 등 형제들은 막내의 기억력에 감탄하고, 세심한 묘사에 웃곤 했다.

강 대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년의 실타래를 정리하는 일이 하나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고 책을 쓴 동기를 밝혔다. “나이가 들어도 어린 시절 집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신기했다”며 그림 작업을 시작한 이유도 덧붙였다. 그림 참 못 그리는 아이였던 강 대표는 2년 전에야 그림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따라서 책 속 그림은 예술성이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다. 책 담당 디자이너는 “사장님 용기가 대단하시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한 후 책 전체에서 그림을 아예 빼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다 읽은 후 이를 번복해 50여 점을 꽉꽉 채워 넣었다. 그의 어설픈 그림들이 지닌 의미를 새로 발견해서다. 강 대표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있었던 유년시절의 복원이며, 그것은 다시 우리를 인생이라는 바다에 빠트리지 않고 헤엄치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

강 대표 역시 책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세상이 요구하고 강요하는 삶의 방식과 잣대를 좇지 않을 나만의 낙관과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경쟁 사회의 톱니바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나만의 낙천과 여유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막내의 뜰’은 그것이 최초의 세계인 ‘집’이자 가족이며, 그것을 물들인 초록빛 자연으로부터 온다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유년을 향한 그리움은 나이 들수록 잃어버리면 안 되고, 꼭 간직해야 할 인생의 절대 목록 중 하나예요. 그 유년의 기억 끝에서, 지금을 살아갈 힘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각자의 유년은 모두 다르겠지만, 저마다의 ‘뜰’이 있겠지요. 그걸 꼭 그려보시길 바라요. 제2, 제3의 ‘누군가의 뜰’이 나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글·사진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