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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어릴 때 살던 집 아파트로 변신
흔적조차 못 찾고 추억만 남아

성공 못한 화가가 이 땅에 남긴
작품 수백 점은 어디로 갔을까

내 작업실도 토지 수용된 운명
도로 되면 그 위엔 차 달리겠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아주 오래전에 본 아름다운 이란 영화의 제목이다. 학교에서 실수로 친구의 숙제 노트를 가지고 온 주인공은 노트를 돌려주러 친구네 집을 찾아가지만, 워낙 흔한 이름에다 비슷비슷한 집들 속을 계속 헤매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그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 친구들이 살았던 서촌의 한옥들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시절에 늘 붙어 다니던 친구의 집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들어서면 친구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늘 다정하게 맛있는 것을 내주시던 작은 한옥의 기억, 비가 오면 대야에 똑똑 떨어지는 빗물 소리…. 사람의 기억력은 얼마나 오래가는 것일까. 공부도 잘하고 못하는 게 하나도 없었던 똑똑한 내 친구는 일찌감치 부모를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내가 유학을 떠났던 삼십대에도 사십대, 오십대에도 우리는,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 만났다.

이민 변호사로 열심히 살다가 퇴직하고, 오랜만에 한국에 여행을 온 그녀를 어느 큰 건물에서 만났을 때, 어릴 적에 본 그의 어머니가 멀리서 걸어오시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지고, 옥인동 사직동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청운동 효자동…, 그곳들에 살았던 초등학교 친구들의 집들과 멀지 않은 내수동의 우리 집이 눈에 선하다.

막다른 골목 큰 대문집, 지금의 ‘경희궁의 아침’ 자리의 작은 일부가 딱 우리 집 자리다.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 헐려 사라진 우리 집의 흔적을 찾아 한동안 헤맨 기억도 이제는 아주 옛이야기가 됐다. 그 뒤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낙원동 집도 헐려서 그 자리에 커다란 오피스텔이 들어선 지 오래다. 가끔 내가 살던 집들은 왜 다 사라지는지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남아 있는 집터가 있기는 하다. 비어 하우스가 돼 버린 동숭동 옛집이다. 그 집에서 이사하면서 우리 가족은 아파트 주민이 됐다. 한번 아파트 주민이 되면 대개 다시는 일반 주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운 집의 기억을 뒤로하고 편리한 아파트 생활에 길들기 때문이다. 이 세상 많은 예술인의 집터가 미술관이 되고 문학관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늘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내 친구의 집들도 다 기억 속에 존재할 뿐 모두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직도 가끔 꿈속에서 어릴 적 우리 집도 가고 친구네 집들도 찾아간다. 그 집들에 살던 친구들은 다들 나이 들어 그 어머니를 닮거나 아버지를 닮은 모습으로 늙어가지만, 꿈속에서는 어린 그대로다. 그중에는 사업이 망해서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고, 나름 많이 성공한 친구들도 있다. 이 나이 들어 생각하니 성공이 뭔지 실패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유명하거나 돈이 많더라도 늘 쫓기듯 불안하다면 하나도 부럽지 않은 일이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는 딸의 영원한 우군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시내와 좀 떨어진 곳에 작업실을 마련해 주셨다. 큰 그림을 그리려면 큰 공간이 필요할 거라며. 그곳에서 많은 대작을 그려냈다. 내게, 산다는 건 그림을 그리는 일이고 그 그림들은 삶의 흔적으로 남았다. 자식들이기도 한 내 그림들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슬슬 그런 걱정을 하는 나이다.

정말 열심히 그림만 그리다가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그림은 삼백 점이 넘었다. 애지중지 길러 어엿한 어른이 된 딸 하나가 빈소에서 어머니를 기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똑 닮아 가냘픈 몸매에 총명한 눈빛을 지닌 그는 어머니의 그림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죽은 뒤 그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하다.

세상의 다수의 돈 많은 사람은 고가의 그림을 사서 뜯어 보지도 않고 스위스 은행에 넣어 두기도 한다. 고흐의 많은 불후 명작이 스위스 은행의 창고로 숨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미술관에 걸리게 된 건 형의 후원자였던 고흐의 동생 테오의 아내 덕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비싼 가격으로 부호들에게 그림을 팔지 않고, 그 그림들에 합리적인 가격을 매겨 미술관 건립을 도왔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가 남긴 갈 데 없는 작품들뿐 아니라, 부자들이 거금을 투자해 벽에 걸지도 않고 창고에 넣어 두는 그림의 운명에 관해 가끔 슬픈 생각이 든다.

큰 그림들을 쌓아 놓는 창고 역할을 충실히 해준 지 30여 년이 된 내 작업실은 8년 전쯤 국가의 토지 수용으로 결정돼, 언젠가 길이 될 운명이다. 개발지역도 아니라 토지 보상은 차일피일 연장돼 오늘에 이르렀고, 담당자들은 계속 바뀌고 언제 보상이 나올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그 누구도 책임 있는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세금만 해마다 꼬박꼬박 내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주인공처럼 하염없이 기다린다. 어느 날 내 작업 공간의 흔적은 사라져 도로가 돼 그 위로 사람들이 차를 타고 달릴 것이다. 문득 슬퍼지는 봄날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그림 = 황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