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환기의 ‘무제’ 연작.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후인 1967년 작품으로, 서양을 떠돌면서도 동양 전통을 품고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한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환기재단

김종영미술관 20주년 기념전
김환기 ‘무제’ 연작 3편 눈길
한글 자모·한자 추상화 선봬

곽인식·정규·이응노·황창배
미술가 11명 글씨 흔적 추적

서예가 김광업·최규명 작품
書가 畵가 될수 있음 보여줘

韓미술 거장, 書畵 바탕으로
서양미술 받아들인 것 증명

이미지 크게보기 김종영의 조각 ‘작품 80-6’과 글씨 ‘장자(莊子)’가 작가의 넓은 세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앗, 김환기가 이런 그림도 그렸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렇게 다채로운 시도를 거쳐서 말년의 점화가 나온 것이겠지요.” 김환기(1913∼1974) 그림을 앞에 두고 동료 기자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둘 다 미술 기사를 써서 밥벌이하는 처지여서 김환기 작품을 많이 봤지만, 그의 문자화에는 눈을 크게 떴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의 개관 20년 전 ‘화가(畵家)의 글씨, 서가(書家)의 그림’(3월 5일∼4월 25일)에서였다.

이번 전시에 나온 김환기의 ‘무제’ 연작 3편은 한글 자모와 한자를 추상화한 그림이다. 담박한 조형미로 긴 여운을 준다. 1967년 작이니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후의 작품. 그가 서양을 떠돌면서도 동양 정신을 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에 살 때 김용준, 이태준 등 당대 문사들과 교우하며 지향했던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그 정신을 서양화에 담아서 자신만의 독보적 예술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헤아리게 한다.

‘무제’ 연작은 유채 물감으로 신문지에 그렸다는 점에서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 그림 ‘휘가로’를 떠올리게 한다. 김환기 제자인 김창열도 생전 천자문을 담은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서양화로 명성을 떨친 스승과 은사가 동양의 문자 세계에서 작품으로 조응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번 기념전은 김환기를 포함한 거장 미술가 11명의 작품에 있는 글씨 흔적을 살핀다. 서양화가로는 곽인식(1919∼1988), 정규(1923∼1971), 한묵(1914∼2016) 등을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작품에서 문자 추상 세계의 같고 다른 점을 살피는 재미가 있다.

동양화가 이응노(1904∼1989)와 황창배(1947∼2001)의 작품도 있다. 해방 이후 출생한 황창배가 일제강점기 이전에 태어난 이응노처럼 서예에 정진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시(詩)·서(書)·화(畵) 일체의 조선 문인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걸레 스님으로 알려진 서화가 중광(1934∼2002)의 작품은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흐린다. 반면, 서예가인 김광업(1906∼1976)과 최규명(1919∼1999)은 글씨가 그림이 될 수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백남준(1932∼2006)은 비디오아트와 오프셋 프린트 작품에 오묘한 문자의 세계를 심어놨다.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뜻을 알 듯도 싶지만, “예술은 고등 사기”라고 했던 백남준의 세계는 그런 해석 너머에 있는 듯싶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서예평론가는 “한국 미술 거장들이 우리 서화 전통을 바탕으로 서양미술을 대등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20세기 한국 미술가들은 일제강점기를 겪고 서양 미술 세례를 받으며 그 반작용으로 민족 전통에 더욱 눈떴을 것”이라고 했다.

두 기획자 말처럼,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동양 정신의 정수를 새겨보게 한다. 그는 자신의 주 영역인 조각뿐만 아니라 서예, 서화 작품을 통해 삶의 도(道)를 향해 부단히 수행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서울대 미대에서 32년간 재직한 그는 후학들에게 인격의 완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전시장 벽면에 적힌 그의 어록을 보면, 추사 김정희에 대한 상찬 속에 우리 문화 전통에 대한 자부가 여실하다. “내가 완당을 세잔에 비교한 것은 그의 글씨를 대할 때마다 큐비즘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새삼 깨닫게 된다. 동양과 서양 전통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한국 미술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꿈이었음을.

이번 전시는 김종영미술관이 지난 20년간 꾸준히 기획전시를 해왔음을 상기시킨다. 김종영을 회고하는 전시에 국한하지 않고 우리 미술의 진로를 제시하는 전시를 많이 선보였다. 작품을 매매하지 않는 미술관으로서 운영이 어려워 작가 유족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미술관 관계자 전언이다. 이 관계자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앞으로도 풍성하고 다채로운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