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세상은 선인장 사막, 62x45㎝, 종이에 먹과 채색,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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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파리와 시인 랭보

스무살도 되기전 조숙한 詩로 ‘천재시인’ 칭송
당대 문학계 별이었던 베를렌과 유럽 떠돌며 영감 나눠
피격 등 우여곡절 끝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탄생
스물다섯 돌연 절필 선언… 일자리 찾아 전 세계 누벼
파격적 작품들로 프랑스 현대詩 구축에 영향

기독교인에게 12월은 11월 다음에 오는 또 하나의 달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달이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옮겨 온 신(神)의 아들이 태어난 달이기 때문이다. 춥고 누추한 땅에서 천상으로 구원의 다리가 연결되는 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 세상에 12월이 주어진 것은 신의 축복이고 말고다. 그런데 “무지개마저도 나를 저주했다”고 한 사내가 있었다. 그때가 12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땅의 시간들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는 적지 않은 작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후 반기독교적인 삶을 살다가 서른일곱의 나이로 지상의 삶을 접었다.

장 니콜라 아르투르 랭보. 스무 살도 되기 전 빼어난 시들을 썼을 만큼 문학적으로 조숙했고 일찍부터 라틴어로 글을 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상과는 끝없이 불화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 천재성이 우리의 시인 이상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상보다는 훨씬 더 ‘지옥 같은 이곳’에 오래 머물다가 갔지만. 시인으로서 그의 출발은 처음부터 특별했다. 스스로 득의작(得意作)이라고 생각했던 시 ‘취한 배’ 한 편을 들고 당대 문학계의 별이었던 시인 폴 베를렌을 찾아간다.

아마 자기소개와 함께 시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자 직접 그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그를 통해 프랑스 문단에 데뷔하고자 했을 것이었다. 랭보보다 열 살이 많았던 베를렌은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고 달콤한 행복에 취해있었다.

그런데 랭보는 하늘 같은 선배 시인에게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둘이서 일상을 벗어나 유럽 여행을 함께하면서 여행의 영감을 시로 써보자고 했던 것.

그 제안에 솔깃했던 베를렌은 신혼집을 나와 함께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올랐고 그렇게 몇 달씩이나 유럽 전역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문학적 성향은 물론 성격과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여행 중 랭보의 내면에 숨어있던 동성애 성향도 노출됐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심하게 다투게 되고 격분한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이 일로 베를렌은 감옥으로 가고 랭보는 파리로 돌아가는데 이 끔찍한 여행 뒤에 불세출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나오게 된다.

이쯤에서 그의 방랑벽은 끝났을까.

아니다. 소년 시절 세 번씩이나 장기간씩 가출했던 그의 방랑벽은 더욱 탄력이 붙어있었다. 잠시 파리에 머물던 그는 또 다른 시인 하나를 불러내어 다시 유럽 전역을 떠돌게 된다.

그리고 피폐해진 상태로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집’은 돌아오는 곳이며 머무는 곳이다. 그러나 그에게 ‘집’은 늘 떠나야 할 그 무엇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두 번의 파격적인 여행과 그보다 더 파격적인 시들을 썼지만 그는 어느 날 파리의 문학 동네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 글쓰기를 비롯한 지적인 모든 행위를 접고 완전히 다른 삶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누군가는 불같은 사랑으로 문학을 시작하지만 차츰 그것이 허무하고 자해 행위와 같으며 결국 자신의 숨통을 조일 것이라는 강박 속에서 ‘쓰기’를 그만둔다. 천재적인 시인이 시인의 길을 그만둔 내적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의 삶을 보건대 시로 생활이 안 된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예컨대 내적 이유로서만 시 쓰기를 그만둔 것은 아님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노동 시장의 일일 노동자로 뽑혀 다니게 되는데 하루살이의 그 삶은 고되고 막막한 것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니콜라 아르투르 랭보 (1854~1891)

파리의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그 옛날 시인 랭보가 저랬을까 싶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특히 알제리나 튀니지 같은 쪽에서 올라온 이방인들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리어있다. 뿌리 없는 삶과 생계에 대한 불안이 그렇게 숨길 수 없이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파리의 한쪽은 날마다 축제인 듯 화려해 보여도 도시의 다른 한쪽에서는 고된 육신의 노동으로 그 육신을 먹여 살려야 하는 ‘파리의 우울’이 보이는 것이다.

랭보는 유럽 전역과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고달픈 육신을 싣고 끝없이 헤매었던 다리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서 결국 절단 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수술 후 얼마 안 돼 사망한다. ‘무지개마저도 나를 저주했다’고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곳에서 위로의 십자가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고도 말했던 시인. 눈감기 전 그는 세상을,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했던 것일까. 어쩌면 랭보야말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같은 세상살이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가장 진하게 사랑했던 사람의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니콜라 아르투르 랭보 (1854~1891)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빛나는 재능으로 시대를 앞지르는 시를 썼지만 방랑, 방황, 반항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다. 일찍부터 라틴어로 글을 썼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으나 지속적인 가출과 동성애 성향 등으로 한 번도 안정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출간한 후 유럽은 물론 중동, 아프리카 등을 전전하며 노동자, 용병, 건축 감독 일을 했다. 아프리카에서 무기 거래 상인으로 일하다가 병이 나서 프랑스로 돌아와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곧 사망한다. 그때가 3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