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집권 16년째를 맞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8일 베를린 의회에서 하원(분데스타크)의 2021년 정부예산 토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 팬데믹속 돋보인 ‘무티 리더십 ’… 메르켈 獨 총리

- “진정한 위기 관리자”
유럽 감염 확산때 차분한 연설
‘스트롱맨’ 트럼프·존슨과 달리
위기 상황속 국민에게 신뢰 줘

- 포용·강단의 ‘메르켈리즘’
병상부족한 나라 환자까지 수용
EU 경제회복기금 타결도 주도
“세계,이제 美아닌 메르켈 찾아”

2018년 10월 29일, 여당인 기독민주당(CDU)의 총선 참패 책임을 지고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20년부터 ‘레임덕’(권력 누수) 시즌을 맞이하리란 예상은 자연스러웠다. 패배 원인은 13년째 이어 온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유럽 난민 위기 당시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했던 정책에 있다. ‘최초의 동독 출신 여성 총리’의 점진적 쇠락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결말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여 후 메르켈 총리는 레임덕은커녕 ‘세계의 리더’로 거듭났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서의 입지도 다시금 공고히 했다.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2년 유로존 재정 위기, 2015년 유럽 난민 위기에 이어 올해의 코로나19 위기까지 16년의 재임 기간 중 닥쳐온 ‘4중’ 위기에 원만하게 대처해 온 메르켈 총리는 임기 만료를 1년 앞두고 “진정한 위기 관리자”로 기억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지율도 74%까지 치솟았다.

◇올해 이례적 대국민 TV 연설…“메르켈의 귀환”=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에서 창궐하던 지난 3월, 메르켈 총리가 TV에 모습을 비췄다. 통상 독일 총리의 대국민 연설은 1년에 한 번, 사전에 제작된 새해 메시지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가 예정에 없던 연설에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12분간 이어진 메르켈 총리의 대국민 연설에는 “사회생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람들과 거리를 둬라” “조부모를 포함한 노인들과 접촉을 피하라” 등의 내용이 완강한 어조로 담겼고, 3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육성을 실시간으로 들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역사적 순간”으로 규정하며 “‘스트롱맨(strongman·권위주의적 지도자)’과 ‘쇼맨(showman·보여주기에 집착하는 지도자)’은 평시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가 후퇴하고 수백만 명이 공포에 빠지는 팬데믹 상황에선 냉철한 두뇌가 필요하다”며 메르켈의 리더십이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했다는 진단을 내놨다. 볼프강 메르켈(메르켈 총리와 무관)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교수도 “그는 훌륭한 웅변가는 아니지만, 차분한 메시지가 국민 신뢰에 기여했다”면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낄 때, 그들은 정부로부터 확실한 보호를 받길 원한다”고 짚었다.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경제 타격을 막기 위해 독일 정부가 1560억 유로(약 205조 원) 규모의 긴급예산을 마련, 즉시 집행한 것을 두고는 “메르켈은 독일인들의 생활 안전망”(독일의 여론조사 관련 권위자 만프레드 귈너)이라는 찬사가 나왔다. 실제 이 정책의 결과로 집권당 지지율은 오르고 야당 지지율은 추락했다.

◇팬데믹 공포 휩싸인 세계의 눈, 미국 아닌 메르켈에게로=메르켈 총리가 위기를 기회로 만든 건 국내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양자화학을 전공한 물리학자 출신으로, ‘마리 퀴리’를 롤모델로 꼽기도 했던 메르켈 총리는 다른 주요 선진국 정상들이 팬데믹 위기에 대해 “괜찮다” “이겨낼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와중, 사태의 심각성을 조기에 파악하고 발 빠르게 대응한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 이른바 ‘마초(남성우월주의)적인’ 스타일의 지도자들과 달리 메르켈 총리는 과학자들에게 신뢰를 보내며 바이러스 확산세에 차분히 대처해 나갔다. 독일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133만8483명(월드오미터 기준)으로 세계 12위이지만, 미국·러시아·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 선진국과 대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병상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 높은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갖춘 독일은 다른 나라의 환자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로 대표되는 ‘트럼피즘(Trumpism)’이 득세하면서 수많은 다자 기구가 좌초 위기에 빠진 가운데 ‘자유주의’적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메르켈 총리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되, 다른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힘 있게 정책을 추구하는 특유의 리더십 스타일로 ‘메르켈리즘(Merkelism)’이라는 정치 용어까지 탄생시킨 그는 올해 하반기 유럽연합(EU) 이사회 의장국으로서 7500억 유로(991조 원) 규모의 경제회복기금 타결을 주도하며 어김없이 ‘무티(Mutti·엄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올해를 포함해 재임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인 10년간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여성’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안드레아 뢰멜레 헤르티행정대학원 교수는 “150년 만에 찾아온 위기의 순간, 세계는 더 이상 미국이 아닌 메르켈을 찾는다”며 “그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대대적인 부흥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EU 경제회복기금 타결 “메르켈 시대의 정점” 평가=헝가리와 폴란드가 막판에 제동을 걸고 나서며 좌초 위기에 처했던 EU 경제회복기금을 되살리는 과정에서도 메르켈 총리의 공이 컸다는 평가다. 앞서 두 국가는 EU가 기금 지원을 ‘법치주의’ 준수 여부와 연결지은 것에 항의하며 기금과 연계된 2021~2027년 장기 예산안 논의 과정에서 비토(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EU는 헝가리·폴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25개 회원국만이 참여하는 장기 예산안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EU 이사회 의장국인 독일의 주도하에 지난 10~11일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결국 원안을 타결했다.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EU 주재 독일 대사인 마이클 클라우스는 법치주의 메커니즘과 관련해 헝가리·폴란드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을 ‘보충 선언’에 담는 방식을 제안했다. FT는 “메르켈의 신조(mantra)는 모두가 항상 참여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라며 “특정 회원국을 배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은 그녀에겐 매우 유해하게 여겨졌다”고 전했다. 유럽이사회(EC)의 베를린 지부 소장인 자나 푸글리린은 “(EU 경제회복기금은) 메르켈 총리가 이사회 의장으로서 남긴 주요 유산이자 ‘메르켈 시대의 정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서우 기자 suwu@munhwa.com


■ 메르켈 총리는

- 1954년 서독 함부르크 출생, 동독으로 이주
- 1978~1989년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근무
-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단체 ‘민주개혁’ 가입하며 정계 진출
- 1991년 헬무트 콜 총리 집권기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
- 1994년 환경자연보호핵안전부 장관
- 1998년 기독민주당 첫 여성 사무총장
- 2000년 기독민주당 첫 여성 대표
- 2005년 11월~ 독일 첫 여성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