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그녀 화가들의 젖 어미, 종이에 먹과 채색, 37x27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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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20세기 예술의 산모

가난으로 센 강에 몸 던지던 시절
피카소·헤밍웨이·피츠제럴드
무명의 늦깎이 화가 마티스까지…
출판비 대주고 작품 사주며
굶주린 얘기 듣고 음식 내준 여인

파리 플뢰르스가 27번지…
시대를 풍미한 입체파·야수파 등
예술 사조 탄생시킨 ‘원조 컬렉터’

파리의 가을은 샹송과 함께 온다. 쥘리에트 그레코와 이브 몽탕의 가을 노래는 결별한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게 한다. 조금 전까지 있던 그 시간들, 사람들, 우정, 사랑이 우리 곁을 떠나고 없음을, 그리고 곧 나도 떠나야 함을 알려준다. 그래서 파리의 가을은 “오래 볼 수 없어서” 더 그리운 것들에 대한 애증과 그리움의 서사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파리의 뒷골목을 지나 센강 앞에 선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따라온다. 강 위로 지나간 시대의 얼굴들이 흘러간다. 공자도 흐르는 강 앞에 이르러 문득 눈물지었다던가. “사라져 간 사람들은 모두 저렇게 흘러갔다는 말이더냐”라며.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수놓았던 이들도 저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친척의 옛집을 찾아 나가듯 지도 한 장을 손에 들고 플뢰르스가 27번지를 찾아간다. 그곳에는 아직도 은성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을까.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 한 골목을 꺾어 돌아 느닷없이 만난 그 지번에는 옛 건물이 무덤덤하게 서 있었지만, 거기에 “불기”같은 것은 없었다. 지나간 시대를 꽃피웠던 사람들은 강물처럼 흘러나가고 없었다. 꽃은 지고 바야흐로 늦은 가을이다.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는 노랫말 하나. 플뢰르스가 27번지. 예전에 거기서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불빛 아래 모여서 어둠이 바닥까지 닿도록 헤어질 줄 몰랐다. 새벽빛이 부윰해져도 여인은 유유히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을 챙겼다. 한결같이 춥고 가난한 시인, 화가, 음악가들은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여인의 치마폭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와인과 음식을 내어주며 한나절 고픈 이야기들도 하염없이 들어주었다. 시인과 작가에게는 출판비를 대주고 화가의 작품을 구입해주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늦깎이 화가 앙리 마티스는 식솔이 많았다. 그에게 파리는 예술 유목민으로 살기에 결코 녹록지 않았다. 어쩌다 작품이 한 점 팔리면 눈이 번쩍 뜨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고 마침내 화가의 길을 포기하려 했다. 그즈음에 그녀가 나타났다. 견디다 못한 화가며 시인들이 센강의 물살 급한 쪽으로 몸을 날린다는 슬픈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이 여장부는 무명의 마티스 그림을 여러 번씩 사주어서 사라져 버릴 뻔했던 세기의 화가를 건져냈다. 스페인에서 올라온 막돼먹은 무명의 사내 파블로 피카소 역시 춥고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는 불어를 5세 정도로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그녀는 역시 이 눈빛 강한 스페인 사내를 눈여겨보았다. 그런 다음 짐짓 그에게 그녀의 초상화 하나를 부탁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 얼굴은 그녀와 전혀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파리 벼룩시장에서 팔리던 아프리카 마스크상을 닮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기분 나빠했을까. 반응은 이랬다. “어떤 화가들이 그린 나의 얼굴보다도 피카소의 것이 마음에 든다.” 백면서생 같은 마티스보다는 야만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피카소에게 더 끌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는 누가 새로운 세기의 문을 열 것인지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마티스와 피카소뿐 아니라 폴 세잔과 에두아르 마네, 조르주 브라크 같은 화가의 작품을 사들였고 넓은 거실을 그들에게 전시장으로 제공했다. 그곳에 자주 왔던 문인으로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이도 있었다. 가난한 음악가 에릭 사티의 연주가 그곳에서 자주 열리곤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20세기 예술의 산모였던 셈이고 훗날 거창한 이름을 달고 태어났던 야수파며 입체파 같은 사조들이 그녀의 자궁에서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요새는 ‘미술 시장의 큰손’이라고 하면 대개 비싼 미술품을 사 모으는 사람 정도로 이해된다. 그러나 진정한 큰손은 미술가에 대한 애정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술계의 원조 큰손이자 컬렉터였다. 미술품의 가치를 금융가치로만 환산하는 천민자본의 생태계 속에서 그 같은 거인의 신화가 새삼 그리워진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미국의 소설가이고 시인이자 비평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허무와 상실감을 담은 실험적 언어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들로부터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이 용어는 일군의 같은 계열의 작가들을 지칭하는 문학사의 용어가 됐다.

런던을 거쳐 파리로 이주해오면서 새로운 예술운동의 대모 역할을 자임했다. 부유했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대부분을 실험적인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매하거나 작가들의 출판비를 대고 음악가의 발표회를 여는 등으로 쓰며 전방위적인 후원을 했다.

진정한 예술 애호가였던 그녀는 문학세계로 인해 ‘다다이스트’의 창시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