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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제작자들

만화 ‘중쇄를 찍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모 출판사의 사장이다. 이 사람은 ‘운이란 모든 사람이 총량적으로 똑같이 가지고 태어나는데, 좋은 일을 하면 모이고 나쁜 일을 하면 줄어든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운을 경계한다. 행운권에 당첨돼 경품을 받거나 자판기에 누가 남긴 거스름돈을 줍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연히 얻게 된 복권이 당첨됐다는 걸 알게 되자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렸을 정도다. 취미는 쓰레기 줍기, 다른 사람 도와주기. 이런 식으로 ‘좋은 일’을 적립해 나간다. 그걸 어디에 써먹느냐. 자신이 만든 책을 히트시키는 데 사용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양질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왜냐면 책이 인간말종이었던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그의 세계관대로라면 어딘가에서 운을 조정하는 ‘누군가’도 당연히 존재해야 하지 않겠나. 이스라엘 작가 요아브 블룸의 세계에서는 ‘우연제작자들’(푸른숲)이 이 일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그날 비행기가 연착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기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당신과 만나게 된 건 그야말로 행운이야” 같은 대사가 나올 법한 상황에 앞서 비행기를 연착시키는 것이 그들(The Coincidence Makers)의 임무다. 갑자기 시작된 교통체증, 간발의 차이로 떠난 엘리베이터, 난데없이 피어오른 영감의 불꽃을 지금껏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는가. 아니, 그것은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우연제작자들이 보내는 암시, 혹은 은밀한 시그널이었다. 우연을 제작하는 비밀조직의 힘은 막강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창의적이다.

다만 그 힘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시작하려는 본인의 의지가 전무하면 발휘되지 않는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기나 하고 인생이든 뭐든 다 의미 없다며 좌절감에 빠져 있고, 저녁은 술에 절어 보내고 아침에는 졸음에 겨워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우연제작자들의 수업 지침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 인생을 볼 때 줄줄이 이어지는 선택을 보지만, 불행한 사람은 줄줄이 이어지는 희생만을 볼 뿐이지. (그러니) 우연을 만들 때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작업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즉, 컵의 물이 절반이나 남았다고 여기는 사람인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인지 구분하라는 말일 텐데, 얼핏 보기엔 진부한 듯해도 ‘이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식의 자기계발서가 횡행하는 요즘 같은 때에 이 소설을 읽게 돼 다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을 당신이 마주하게 된 것도 필시 모종의 의미가 있을 터인데, 그게 뭔지는 각자 알아보시길.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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