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79년 뉴욕 서재에서 찍은 사진. 수전 손택은 소설과 비평, 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논쟁적인 작품을 쏟아낸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글항아리 제공

-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 |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한재호 옮김 | 글항아리

수전 손택 死後에 나온 첫 평전
미공개 일기·주변인물 증언 소개

사라예보 대학살에 통렬한 비판
‘9·11’땐 맹목적 애국주의 반대
대중문화 폄훼 행태 조롱하기도

“내겐 무기될 만한 정체성 필요”
사생활·결함도 가감없이 기록

이미지 크게보기

1993년 7월 뉴욕에 머물던 수전 손택은 내전이 한창이던 보스니아 사라예보로 날아갔다. 매주 수백 명이 참혹하게 살해되는데, 먼 곳에서 ‘제1세계 지식인’ 역할만 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교전 지역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인간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의 숭고함을 성찰하고 싶었다. 총칼을 차고 전장(戰場)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손택은 뜻을 같이하는 예술가들을 모아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다. 끝없는 기다림 속 존재의 부조리를 담은 이 공연은 전쟁에 대한 “명시적 저항”이자 사라예보의 대량학살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국제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독일 비평가 다니엘 슈라이버가 쓴 이 책은 손택(1933∼2004) 사후에 나온 첫 평전이다. 미공개 일기와 주변 인물의 증언을 바탕으로 손택의 삶과 업적을 시간순으로 따라간다. 반체제 지식인, 문예 비평가, 소설가, 영화감독, 연극 연출가…. 손택은 다양한 수식어로 불렸으나 어떤 수식어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 인물이었다. “한 주에 스무 편의 일본 영화를 보고, 프랑스 소설 다섯 편을 읽을” 만큼 맹렬한 예술광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행동하는 지성인”이기를 원했다. 사라예보 일화는 이런 가치와 지향을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장면이다.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2001년 9·11 테러가 벌어졌을 때도 손택은 미국인들의 맹목적 애국주의에 반하는 논설 ‘살인자들은 비겁자가 아니었다’를 발표하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정당한 수단에 의한 문제 제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도, 미국 정부의 실패한 중동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제언은 그녀에게 ‘배신자’ ‘반미 좌파’라는 낙인을 찍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대중매체의 보도를 성찰하며 “이미지로 전쟁의 참화를 소비하는” 행태를 꼬집은 ‘타인의 고통(2003)’은 이런 십자포화에 가까운 비판 속에서 태어난 문제작이다.

‘타인의 고통’이 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면, 1966년 출간된 ‘해석에 반대한다’는 30대의 손택에게 명망을 안겨준 에세이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술 작품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관습적 비평을 “개인의 정서적 경험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비평가의 공격으로부터 예술을 보호하려면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순수한 심미적 지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중문화를 하찮게 여기며 예술에 위계를 설정하는 행태를 조롱하기도 했다. 9·11 테러 당시의 논설이 많은 미국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듯, ‘해석에 반대한다’는 각국에서 쏟아진 상찬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기성 지식인들이 손택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일대기를 총체적으로 조망한 전기답게 손택의 업적만큼 눈길을 끄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복잡다단한 면모다. 저자의 ‘균형 잡힌 서술’이 돋보이는 이 대목은 20세기 최고 지식인의 오만한 성격과 자아도취적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손택은 영향력 있는 사람과 관계 맺는 능력을 타고났으나 “멍청한 사람과는 좀처럼 말을 섞는 법을 몰랐다.” 또 대학 강연을 할 때면 쉽게 짜증을 냈는데, 이는 뻔한 질문을 하는 어린 학생들이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발언도 많이 했다. 저자는 유년기에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책을 술술 읽었다거나, 30쪽의 에세이를 위해 수천 쪽의 초고를 쓰곤 했다는 주장은 “곧이듣기 어렵다”고 말한다.

책은 연애와 사랑을 둘러싼 사생활도 세밀히 기록한다. 20대 중반에 결혼 생활을 청산한 손택은 여성 극작가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 등과 뜨거운 한 시절을 보냈다. 사후 공개된 일기에는 해방의 도구로서 동성애와 글쓰기의 상관관계를 암시하는 말이 적혀 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내게는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정체성.”

일생 동안 ‘세상’과 ‘예술’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던 손택. 그녀는 “지성의 마라톤 주자”처럼 열심히 살았고,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 지식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유년 시절, 손택의 가슴에 깊이 박힌 것은 ‘전쟁 기간에는…’이라는 구호였다. 소녀에게 이 말은 전쟁의 참상을 응시하게 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할 것”임을 꿈꾸는 희망으로 들렸다. 훗날 목숨을 걸고 사라예보의 전쟁터로 향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절망에 주저앉지 않는 낙관주의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500쪽에 이르는 전기를 덮고 나면 결점도 많았으나 부제처럼 ‘매혹적인 영혼’을 지녔던 한 여성의 초상이 남는다. 500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