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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올해 조지훈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았으나, 관련 행사들이 위축됐다. 감염병 사태 탓이다. 이런 와중에 문예지 ‘PEN 문학’ 최근호에서 지훈의 장남 조광렬 씨가 쓴 사부곡(思父曲)을 만난 것은 반가웠다.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조 씨는 ‘아버지가 남긴 교훈’이라는 글에 절절한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70대 아들이 반세기 전에 타계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새긴 교훈은, ‘죽음과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세상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것을 지훈은 경계했다.

조 씨 글을 계기로 지훈의 삶을 살피니, 지금도 울림이 컸다. 정치·이념 갈등이 극심한 사회에서 지식인의 표상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알려진 것처럼, 지훈은 지천명(知天命)을 넘기지 못한 채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임에도 시인, 국학자, 교육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방대하고 돌올하다. 그 업적들은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은 이후부터 줄곧 질병과 동행하며 얻은 것이다.

그는 타계 직전에 시 ‘병에게’를 썼다. 그중 한 대목.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쫓아내도 다시 오는 병을 증오하는 대신에 삶을 성찰하는 촉매로 삼았다. 이 시는 바이러스와 동행하게 된 오늘의 우리에게도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바라본 것에 대한 각성을 주며 사고 지평을 넓히게 한다.

지훈은 지병을 통해 늘 죽음을 벗하며 삶의 허욕을 버리려 했다. 그런 생사관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비극적으로 겪어야 했던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조헌영은 제헌 의원이었는데 6·25전쟁 때 납북됐다. 어머니는 그로 인해 울화병을 얻어 피란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냈던 할아버지 조인석은 전쟁 중 좌우 이념 대립으로 문중이 갈등을 빚자 자결로 삶을 끝냈다.

지훈은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이런 지론을 품게 됐다. “경박한 진보주의보다는 성실한 보수주의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

동시대 좌파 지식인들은 지훈의 보수주의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지성계에서의 위상을 흔들진 못했다. 그의 지사적 우국(憂國)이 생애 내내 일관됐기 때문이다. 그는 20대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으나 일제에 끝내 협력하지 않았다. 4·19혁명 때는 교수 시국선언을 주도해 이승만 하야를 이끌었다. 5·16 세력에 기대를 걸었으나 독재의 길로 접어들자 강력히 비판했고, 정권의 입각 제의에 일절 응하지 않고 기개를 지켰다.

그는 권력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불의를 행한다면 분연히 맞서는 것이 지식인의 지조라고 했다.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언행일치의 본을 보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민심의 저변에서 ‘시무(時務)’ 상소문과 ‘만인소(萬人疏)’가 잇따르는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볼까. 진영의 정치 이익을 위해 독선의 논리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정권의 전횡조차 옹호하는 ‘어용 지식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겉으론 개혁과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속으로 갖은 이득을 챙긴 ‘입 진보’들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살아 있는 세상의 눈앞의 이익과 명예만 팔리지 말아라. 더러운 이름을 남길 양이면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