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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작가 김영하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남파간첩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4시간 내 귀환하라”는 명령을 이메일로 받은 뒤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김기영은 1984년 남파된 엘리트 스파이인데 상관이 숙청되면서 20년간 잊혔다가 갑작스레 복귀 명령을 받은 인물로 그려졌다. 소설이 발간된 2006년은 일심회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때인데, 당시 연루자들은 북한 공작원과 이메일로 교신하며 이동식기억장치(USB)에 정보를 담아 북측에 넘겼음이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난 바 있다. 소설은 한 시대의 반영이듯, ‘빛의 제국’엔 일심회 사건 전후의 사회상이 담긴 것이다.

북한은 난수(亂數) 방송을 대남 지령은 물론 공작원 신분 확인용으로도 활용했다. 박찬수 기자의 ‘NL현대사’에 따르면 남파 공작원이 주체사상 교리서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씨나 중부지역당 사건의 총책 황인오 씨에게 접근할 때 난수 방송으로 신분을 확인시켰다. 김 씨는 1989년 자신을 찾아온 북한 공작원에게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하자 “며칠 후 내가 말하는 내용이 라디오의 평양 방송에서 나올 것이니 들어보라”고 했다. 그대로 되자 김 씨는 그를 따라 조선노동당 당원이 됐고, 난수 방송을 통해 지령을 받기 시작했다. 난수 방송은 남북정상회담 후인 2000년 12월 사라졌다.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뉴미디어를 활용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남조선 혁명에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라”는 김정일 교시도 작용했다. 이후 북한은 문서나 사진 이메일 안에 메시지를 숨기는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2011년 왕재산 사건 때 드러났다.

북한 평양 방송이 지난달 29일 ‘710호 탐사대원을 위한 복습 과제’라는 내용의 난수 방송을 유튜브 계정에 올려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것이 국내 보수 성향 청년단체인 ‘전대협’이 지난해 제작해 유튜브에 올린 가짜임이 드러나자 삭제했다고 한다. 정보 당국에서는 북한이 지난 2016년을 전후해 난수 방송을 재개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번 사건은 의문투성이다. 북한이 해당 난수 방송을 공작원 작전 지시용으로 이용한 것인지, 박지원 원장 취임 후 국가정보원 대응력을 떠보기 위한 교란 작전인지 알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대공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려는 와중에 발생한 일이어서 더욱 불길하다.